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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ㆍ경험 없는 초보 역학조사… 바이러스 쫓기만도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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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ㆍ경험 없는 초보 역학조사… 바이러스 쫓기만도 벅찼다

입력
2015.06.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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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당국 역학조사인력 34명 불과

그나마 대부분 단기교육 '땜질식'

결국 확진자 감염 경로 미궁

자가 격리자 관리마저 구멍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의료계 인사들이 우리나라 보건체계가 드러낸 심각한 허점으로 역학조사를 꼽고 있다. 22일 의료계에 따르면 메르스 역학조사는 “인력도, 경험도 턱없이 부족한 탓에 감염 경로 차단은커녕 확산되는 바이러스를 쫓아가기 벅찼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부 확진자들의 감염 원인이 미궁에 빠지고, 자가격리자 관리에 구멍이 뚫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역학조사는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건강 상태를 상세히 확인해 병의 원인과 양상, 발병 가능성을 밝혀내는 의학연구 기법이다. 실험이나 임상으로 미처 알아내지 못한 병의 특성을 파악하거나 관련 정책을 세우는데 유용하다. 메르스 같은 신종 감염병이 발생했을 때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선 치밀한 역학조사가 필수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보건당국의 역학조사 인력은 34명에 불과했다. 이마저 32명은 공중보건의로, 군복무 중인 의대 출신 인력들을 단기간 교육시켜 투입한 것이다. 환자와 감염 의심자가 급속히 늘자 보건당국은 인력 부족을 시인하고 부랴부랴 전공의와 간호사, 보건학 전공자 등으로 구성된 90여명의 민간역학조사반을 꾸려 현장에 배치했다.

이 같은 ‘땜질’ 처방만으론 제대로 된 조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의료인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공중보건의는 3년이 지나면 현장을 떠나고, 조사반은 한시적 조직이다. 이종구(가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 이종욱글로벌의학센터 소장은 “역학조사관은 일종의 수사관”이라며 “수년 동안 조사기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유능한 인력이 된다”고 말했다.

예상된 우려는 이번에 현실로 나타났다. 일부 확진자들의 감염 경로가 미스터리에 빠진 것이다. 115번 환자는 외래진료를 위해 삼성서울병원을 방문했을 뿐 ‘슈퍼전파자’인 14번 환자가 머문 응급실에 들르지 않았는데 감염됐다. 또 119번 환자는 52번 환자가 거쳤던 평택박애병원을 방문하긴 했지만, 52번이 도착하기 전 병원을 떠났는데도 감염됐다. 이번 역학조사가 대부분 환자들 기억이나 폐쇄회로(CC)TV에 의존하는 걸 감안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감염 경로가 밝혀질 가능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확진 환자나 바이러스와 접촉했을 가능성을 예상해 격리 대상을 선정하는 것도 역학조사 영역이다. 하지만 접촉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해 뒤늦게 격리 조치에 들어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메르스 여파로 인한 학교 휴업이 사실상 끝난 22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밝은 표정으로 등교하고 있다. 연합뉴스
메르스 여파로 인한 학교 휴업이 사실상 끝난 22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밝은 표정으로 등교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내에 역학조사 교육과정이 없는 건 아니다. 의대나 보건대학원 등에선 대부분 역학조사를 가르친다. 문제는 배출된 인력들이 현장을 익히고 전문성을 키울 일자리가 없다는 점이다. 역학조사 인력은 평상시 별다른 업무가 없다는 이유로 질병관리본부 등 국가 보건체계에서 늘 실험이나 임상 전문가에게 밀린다. 논문이 나오기 어려운 분야라 연구비 확보가 쉽지 않아 대학에서도 인력을 꾸준히 길러내기 힘들다. 이런 현실 때문에 국내에서 역학조사는 “공공도 꺼리고 민간도 쳐다보지 않는 사각지대”가 돼 왔다.

강대희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이제부터라도 보건당국이 역학조사 전문인력을 충원하고, 평상시엔 위기관리 방법을 훈련하거나 외국에 파견해 에볼라 등 감염병 대응 경험을 쌓는 식으로 운영하면 향후 위급 상황 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미국 등 선진국에선 연구는 물론 정책 수립도 역학조사를 기반으로 이뤄져, 상당수 전문인력이 외국 사례까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정보통신(IT)이나 빅데이터 전문가들 사이에선 역학조사에 첨단 기법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번 사태에도 확진 환자들의 동선 추적에 IT 기술이 활용됐지만, 아직은 제한적이다. 전문가들은 “자가격리자가 격리 장소를 벗어나는 행위를 통신이나 위치 데이터를 이용하면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루 몇 차례 통화로만 감시하는 방식은 격리자의 일탈을 막지 못해 방역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사회적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한계가 있음이 이미 드러났다. 그러나 이런 기술이 적용되려면 개인정보 관련 법과 제도부터 재정비 돼야 한다. 현재로선 아무리 자가격리자라 해도 개인의 통신이나 위치 정보를 동의 없이 파악하는 건 위법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전문가들은 감염병 확산 같은 국가 위기 상황 때 개인정보 보호와 방역 효율성 모두를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임소형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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