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유환구 기자

등록 : 2018.02.17 11:00
수정 : 2018.02.17 18:11

오락가락 병역거부 판결… 헌재의 교통정리 시급한 이유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판결 71건…작년부터 급증

등록 : 2018.02.17 11:00
수정 : 2018.02.17 18:11

“특정 법관 1명(사유는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선고)을 포함해 4명의 위원에 대한 교체 여부를 검토함”

지난달 22일 공개돼 사법부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 조사보고서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합니다.2016년 4월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을 열어보니 ‘(사법행정위원회 산하) 법원문화개선위원으로 임명된 4명의 위원에 대한 교체 여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고서에는 4명 중 1명에 대해서만 그 ‘사유’를 적어놨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선고’라고 말입니다.

이는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 대한 사법부 내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무죄선고만으로도 ‘강성’으로 분류될 만큼 소수 판사들의 ‘튀는 판결’이라는 인식이 강하다는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건 작성 후 2년이 지난 현재, 사법부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습니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하급심의 반란’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헌법재판소가 이 상황을 빨리 ‘교통정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아 작년 5월15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 퍼포먼스. 연합뉴스

무죄판결 급증… 대기사건만 710건

양심적 병역거부란 종교나 비폭력ㆍ평화주의 신념 등에 따라 입영을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광복 이후 병역거부로 수감된 사람은 작년 10월 기준 1만9,200여명이나 됩니다.

이는 그 동안의 판결에서 1만9,200건 이상의 유죄가 선고됐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무죄 판결은 현재까지 71건에 불과합니다. 비율로 치면 0.3%에 불과한, 극소수 판사들이 소신에 따른 목소리를 내온 셈입니다.

하지만 작년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습니다. 서울남부지법 이정렬 판사가 첫 무죄 판결을 낸 2004년 이후 2016년까지 총 17건의 무죄 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작년 한 해에만 45건의 무죄 판결이 내려집니다.

올해도 분위기는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9일 제주지법 선고를 비롯해 올 들어서만 9건의 무죄 선고가 나왔습니다. 지난 1일 부산지법에서는 3명의 판사가 합의부를 구성해 심리하는 항소심에서도 역대 두 번째로 무죄 선고가 나왔습니다. 물론 작년에도 270여건의 유죄 판결이 나와 무죄 선고보다는 훨씬 많았지만, 이제는 소수의 튀는 판결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워진 상황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아예 판결 자체를 미루고 있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대법원과 헌재가 명확한 판결을 내려주길 기다리면서 선고를 최대한 연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조계에 따르면 현재 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병역거부 관련 사건은 710건에 달합니다. 이 중에는 대법원에 계류된 사건도 110건에 이릅니다. 2015년에 접수된 사건이 아직 판결이 나지 않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통상 1년간 수감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500~600명 가량이었지만, 최근엔 270명대까지 줄어든 상태입니다.

사법 역사상 유례없는 ‘하급심 반란’

이런 상황은 사법 역사상 유례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작년 6월에는 대법원이 유죄 확정판결을 했는데도 이후 6개월 동안 하급심에서 31건의 무죄 판결이 쏟아졌습니다.

헌재가 2004년과 2011년 두 차례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처벌하도록 한 법규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리고, 대법원도 2004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유죄 판례를 남겼음에도 하급심이 이를 무시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016년 10월 처음으로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린 한 판사는 판결문에서 “단일 법 조항에 대한 일선 판사들의 이와 같은 혼란은 사법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무죄 판결을 내리는 재판부들의 논리는 대체로 비슷합니다. 군복무의 고통을 피하려거나 무임승차하는 보호를 바라는 게 아닌 만큼 양심에 따른 결정은 존중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주지법 형사2단독 황미정 판사는 지난 9일 무죄를 선고하며 “양심에 따른 입영거부 결정을 처벌하는 것은 피고인의 헌법상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에는 병역거부자를 형사 처벌하지 말고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는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2015년)와 국가인권위원회 권고(2016년)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같은 권고 등을 근거로 과거 유죄 판결을 했던 판사가 입장을 바꾸는 경우도 종종 등장하고 있습니다. 작년 5월 서울동부지법 이형주 부장판사는 자신이 “2005년부터 2012년 사이에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16건을 유죄로 선고했다”고 밝히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는 것이 일부 판사에게만 통용되는 법 해석이 아니라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에서 확인한 결론임을 이 판결로써 강조한다”며 기존 판단을 뒤집었습니다.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가 작년 11월22일 오전 국회 본청에서 열린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인사청문특위에 출석해 굳은 표정을 하고 있다. 오대근기자

헌재에 쏠린 ‘눈’… 9월이 마지노선

이 같은 혼란을 해결할 열쇠를 쥐고 있는 곳은 국회와 대법원, 그리고 헌법재판소입니다. 하지만 국회나 대법원이 ‘총대’를 메기는 쉽지 않다는 게 중론입니다.

국회의 경우 찬반 여론이 여전히 팽팽하다는 점이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권위의 국민의식 실태조사 결과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은 2005년 10.2%에서 지난해 46.1%까지 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반대 여론(52%)이 더 높은 형편입니다.

작년 10월 서울지방변호사회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에서만 논의해서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결국 사법부가 판결을 통해 입법부의 대체복무 도입을 강제하게 해야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대법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판례를 변경해야 하기 때문에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야 합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작년 9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부작용을 최소화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을 전제로 양심적 병역 거부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을 것이란 분석도 나옵니다. 법조계 관계자는 “현재 대법관의 구성을 보면 전원합의체을 열어도 판례 변경은 쉽지 않다”며 “대법원장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만큼 쉽게 전원합의체에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결국 문제해결의 열쇠는 헌재가 쥐고 있습니다. 헌재에는 2012년 이후 병역법 조항의 위헌성 판단 요청이 28건이나 쌓였지만 6년째 답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은 작년 11월 인사청문회에서 “헌재에서 가장 오래된 사건이며 심의와 평의도 수 차례 진행했다”며 “기본적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처벌도 감수하는 상황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신속한 재판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헌재의 9명 재판관 가운데 이진성 소장을 포함한 5명은 오는 9월 임기가 만료됩니다. 때문에 늦어도 상반기 안에는 헌재의 결론이 내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일각에서는 가장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형사처벌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도, 법률 공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회가 법을 개정할 때까지는 현행 법률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환구 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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