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영식
주필

등록 : 2016.05.12 20:00

[황영식의 세상만사] 마(魔)는 우리 안에도 있다

등록 : 2016.05.12 20:00

기업윤리 부재와 정부기능 부전(不全)

검찰ㆍ국회의 소극적 대응도 드러나

과잉ㆍ과소 극단만 오가는 안전의식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얼개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점점 더 어처구니가 없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건 기업윤리 부재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은커녕 기초적인 제조물 책임(PL) 의식조차 엿볼 수 없다. 특별한 경각심이 요구되는 화학물질을 다루는 기업이 이 정도라면, 일반 제조업체는 어땠을까 싶다.

독성 원료물질인 PHMG와 PGH, MIT, CMIT 등을 살균제 제조사에 공급한 기업이나 이를 원료로 살균제를 제조ㆍ판매한 업체 모두 안전성 검사를 외면했다. 또 의학적으로 폐 손상 원인물질로 확인된 뒤로도 문제를 가리기에 급급했다. 일부 업체는 문제가 불거진 뒤에도 독성실험 결과를 왜곡하는 등의 은폐 시도를 했다.

국민 건강과 안전을 지켜주어야 할 정부의 기능 부전도 거듭 확인됐다. 최대 피해를 낳은 PHMG가 1996년 카펫 항균제 원료로 쓰일 때나 5년 뒤 가습기 살균제 원료로 쓰일 때 모두 독성검사 없이 판매를 허용했다. 피해자가 속출하고 의문의 폐 손상과 가습기 살균제와의 연관성이 확인한 뒤로도 한동안 보건당국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더욱이 폐 손상과 살균제의 인과관계가 확인된 뒤에도 피해자 파악과 구제 대책에 소홀했다. 역학조사와 화학물질ㆍ제조물 관리 등을 각각 보건복지부(질병관리본부)와 환경부(환경과학원), 산업통상부자원부 책임으로 갈라놓은 벽에 기대었을 뿐 적극적으로 이 벽을 깨부수고 국민안전을 도모하려는 당국은 없었다.

사후 대응도 한심했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가 (폐 손상의) 원인으로 추정된다”는 정부 역학조사 결과가 나온 이듬해 일부 피해자가 검찰에 사건을 고소했으나 검찰은 달랑 한 명의 검사에 수사를 맡기는 데 그쳤다. 그마저 1년 뒤 최종 역학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단됐다. 정치권의 대응 역시 안이했다. 2013년 야당이 피해 구제를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으나 상임위원회(환경노동위원회)에서 발이 묶였다. 아직 소송이 진행 중이라거나 명확한 인과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발목을 잡은 정부ㆍ여당의 책임이 크다. 야당이라고 할 일을 다했을까. 특별법안 발의로 대여 공세 틀은 갖추었지만, 그 동안의 숱한 연계처리 전술 어디에도 특별법안은 들어가지 않았다. 최종 처리에 적극성을 보이지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여야 책임은 오십보백보다.

국가 총체적 부실ㆍ부전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세월호 참사와 견줄 만하다. 한 가지 차이는 있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ㆍ국민적 안전불감증, 즉 안전의식의 전면적 부재의 결과였다. 반면 이번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국가적 안전의식의 결여는 마찬가지지만, 국민적 안전의식의 과잉이 출발점이었다.

개인적으로 30년 넘게 가습기를 써왔지만 가습기 살균제를 써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유해성 인식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무균실에서 지내야 할 정도로 저항력이 낮지 않는 한, 일상생활의 세균은 몸으로 겪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TV의 세균 영상에 거부감을 느껴왔다. 음식점 식기나 도마는 물론이고, 가정의 화장실 변기, 현관 출입문이나 방의 손잡이, 심지어 칫솔이나 물컵에서 채취한 시료에까지 현미경을 들이댄 TV의 세균 영상은 어지간한 사람은 두려워할 만큼 끔찍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가습기 살균제를, 그것도 전체 가습기 사용자의 30%인 1,000만 명 이상이 썼다니, 세균에 대한 집단공포가 조장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흔한 선진국 사례가 유독 ‘일상생활 속 세균 증식의 위험성’ 보도에서는 한 컷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그 배경도 의심스럽다.

마(魔)는 우리 안에도 숨어있다. 교통사고를 조심하면 그만이지, 자동차 없는 사회를 꿈꿀 것은 아니다. 삶은 널린 위험을 조심스럽게 헤쳐나가는 것일 뿐이다. 생물학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깨끗한 것, 좋은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 자체가 마의 작용이다. 과잉과 과소 양 극단을 오가는 대신 그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으라는 게 옛사람들의 가르침이다.

주필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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