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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과 ‘밀정’ ‘헝거’를 떠올리는 가을 밤

입력
2016.10.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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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터널'의 세현은 터널 붕괴사고로 갇힌 남편 정수를 생각하니 음식 앞에서 목이 메인다. 쇼박스 제공
영화 '터널'의 세현은 터널 붕괴사고로 갇힌 남편 정수를 생각하니 음식 앞에서 목이 메인다. 쇼박스 제공

며칠 전 문득 여름 흥행작 ‘터널’(감독 김성훈)을 떠올렸다. 영화를 볼 때 좀 무심하게 지나갔던 몇몇 장면이 새삼스레 마음에 걸렸다. 음식에 대한 장면들이다. 영화 속에선 달걀이 등장하는데 이중적인 장치로 쓰인다. 남편 정수(하정우)가 붕괴사고로 터널에 갇히고 구조가 시작되자 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은 조리 노동으로 구조대원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다. 빗물 새는 천막 안에서 식사하는 구조대원들에게 달걀 프라이를 일일이 대접하기도 한다. 구조대의 최반장(정석용)은 바닥에 떨어진 달걀 프라이를 주워 빗물에 씻어 먹는다. 세현의 정성이 갸륵하기도 했겠으나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정수의 처지가 떠올랐을 것이다.

정수의 구조는 진척이 없고, 중단됐던 이웃 터널의 공사 재개 압박이 커지는 사이 최반장이 사고로 숨진다. 생사도 모르는 사람을 구하려다 다른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니 구조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커진다. 묵묵히 구조대원들 식사 준비를 돕던 세현 앞에 최반장의 모친이 나타나 달걀을 던진다. 선의의 표상이었던 달걀은 분노의 상징으로 표변한다. 먹는 행위와 음식이 상황에 따라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터널’에 대한 생각은 ‘밀정’(감독 김지운)으로 옮겨갔다. ‘밀정’의 여자 의열단원 연계순(한지민)은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을 당한 뒤 옥사한다. 거적에 덮여 실려나가는 계순을 언뜻 알아본 조선인 일본경찰 이정출(송강호)이 사인을 묻자 인부는 “곡기를 끊고 이리 됐다”고 답한다. 정출은 크게 흐느낀다. 감성보다는 이성을 앞세우던 현실적인 인물이 감정적으로 가장 흔들리는 대목이다. 음식을 거부해 이르는 죽음은 비정한 사람들까지도 비감에 젖게 한다. 자신의 신념을 뚜렷이 드러내며 행하는, 가장 긴 시간이 소요되는 자살의 한 형태라서 그럴 것이다.

영화 '헝거'는 단식투쟁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오롯이 전한 보비 샌즈의 삶을 처절하면서도 탐미적으로 그려낸다. 오드 제공
영화 '헝거'는 단식투쟁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오롯이 전한 보비 샌즈의 삶을 처절하면서도 탐미적으로 그려낸다. 오드 제공

‘밀정’에서 비롯된 단상은 지난 3월 늑장 개봉한 영국 영화 ‘헝거’(감독 스티브 매퀸·2008)로 이어졌다. 북아일랜드 독립운동단체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젊은 리더로 1981년 감옥에서 60일 동안 단식 투쟁을 하다 세상을 떠난 보비 샌즈(마이클 패스밴더)의 실화를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다. 샌즈는 영국 정부를 향해 자신을 테러범이 아니라 정치범으로 인정해달라며 가장 치열하면서도 정적인 저항 방식을 택했다. 영화는 점점 여위어가는 샌즈의 몸을 비추며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신념을 스크린에 투영한다. 영화는 한 인간의 숭고한 행동을 미적 영역으로 승화시키며 큰 공명을 전한다.

낭만이 출렁이는 가을 밤과는 거리가 먼 얘기들일지 모르겠다. 하루 세 번, 때가 되면 챙겨야 하는 끼니가 얼마나 엄숙하고도 비루한 것인지 영화를 통해 새삼 돌아보게 되는 이유, 다들 알 것이다.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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