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열사 확대=문어발 인식 탈피
벤처 M&A 활성화 필요”
계열사 현황도 분기 단위 발표
숫자 증감 여부는 판단 않기로
투자- 화수 재투자 선순환 기대
“플랫폼 구축 등 대책 필요” 지적도
구글, 인텔,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IBM 등 미국 5대 정보기술(IT) 기업이 2012년~2016년 투자한 신생혁신기업(스타트업)은 420개나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네이버, 카카오, SK플래닛 등 일부 IT 기업이 주도한 인수ㆍ합병(M&A)가 고작이다. 이 때문에 국내 스타트업이나 벤처기업이 M&A를 통해 투자금을 회수하는 비중도 3.1%(2016년)에 불과한 상태다. 미국에선 이 비중이 86%나 된다.
이처럼 M&A 시장이 낙후된 데에는 대기업의 M&A를 무분별한 ‘문어발식 확장’으로 보는 부정적 시각과 공정거래위원회의 규제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엔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 활성화가 절실하다. 이에 공정위가 앞으론 대기업의 계열사 수 변화 등엔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대기업의 스타트업 M&A는 적극 장려하겠다는 게 공정위의 태도다. 이는 1981년 공정거래법 제정 이후 상호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도 등을 통해 대기업의 양적 팽창을 억제하는 데만 주력해 온 공정위의 정책 기조가 사실상 180도 바뀌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4일 공정위에 따르면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달 30일 국회 4차 산업혁명 특별위원회에서 “중소벤처기업의 혁신 성과를 회수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인 M&A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며 “대기업 M&A에 문어발식 확장이란 ‘주홍글씨’가 찍히는 점을 극복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이어 “(대기업 계열사 현황에 대한) 발표 방식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공정위는 대기업의 계열사수 증감 여부로 ‘양적 팽창’ 여부를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공정위는 출자총액제한제도(대기업 출자한도를 순자산의 40% 이내 제한)가 폐지된 2009년부터 매달 자산총액 5조원 이상 대기업의 계열사 현황을 발표해왔다.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악용해 중소기업들의 영역까지 싹쓸이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는 대기업의 스타트업 M&A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공정위의 계열사 현황 발표가 부담이 돼 M&A가 아닌 다른 방식의 투자를 모색하는 대기업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상반기 우리나라 대기업의 M&A 건수는 45건으로, 전년 같은 기간(59건)보다 23.7%나 급감했다.
공정위는 우선 매달 발표하던 대기업 계열사 현황을 올해부턴 분기마다 발표하기로 했다. 신봉삼 공정위 기업집단국장은 “발표 내용도 과거 ‘숫자’만 공개하던 방식에서 탈피, 계열사 변동의 특징과 의미를 함께 분석하기로 했다”며 “계열사 증감만 갖고 경제력 집중 여부를 판단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신영선 전 공정위 부위원장은 지난 연말 한 간담회에서 “총수일가 사익편취 우려 등이 없는 계열사 확장엔 무조건 반대하지 않겠다”며 “기술혁신과 중소벤처기업 지원을 위한 M&A는 오히려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시장은 공정위의 변신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 동안 대기업이 스타트업 M&A에 적극 뛰어들지 못하면서 ‘투자→회수→재투자’의 선순환 구조도 구축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 스타트업 투자자(벤처캐피탈, 엔젤투자자 등)가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길은 M&A로 기업을 넘기는 것보단 기업공개(IPO)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타트업이 상장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2년이나 된다.
보다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초대 벤처기업협회장을 지낸 이민화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대기업이 유망 스타트업과 벤처기업 ‘매물’을 효율적으로 탐색할 수 있는 플랫폼(기술거래소)을 구축하고 지주회사의 손자회사가 증손회사 지분 100%를 보유하도록 한 공정거래법상 규제를 개선하는 등 종합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세종=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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