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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끼리 스스럼 없이 "H사 기저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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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끼리 스스럼 없이 "H사 기저귀는…"

입력
2015.10.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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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라는 개념 40년전 사라져

여성들 사회진출 늘려 사문화

육아·가사 공평한 분담 정착

480일 육아휴직도 나눠서 사용

/2015-10-16(한국일보)
/2015-10-16(한국일보)

“스웨덴에는 주부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1950년대만 해도 주부라는 단어가 있었지만 60, 70년대 거의 모든 여성이 사회 진출을 하게 되면서 그 말을 쓸 일이 없게 됐죠.”

대학 졸업 후 26년간 스웨덴에 거주하면서 국가교육청 간부를 지낸 뒤 2011년 귀국한 황선준(57) 경남도교육연구정보원장의 말이다.

가정에서의 양성평등이 당연한 스웨덴 사정을 들어보면 거의 별세계 얘기다. 한 예로 스웨덴 교육청에서 일할 당시 젊은 남자 동료들 사이에 ‘H사 기저귀 제품은 오줌이 새지 않지만 공기가 통하지 않아 좋지 않다’는 식의 육아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화제에 오른다는 것이다.

보수적 기질이 강한 경상도가 고향인 황 원장도 스웨덴 출신 부인 레나 황(52)을 만나 많이 변했다고 한다. 스웨덴에서 교육을 받고, 직장 일을 하면서 스웨덴식 사고에 익숙해진 때문일 것이다. 부인과 집안일을 거의 반반씩 나눠서 하지만, 한창 아이를 키울 때 재미 삼아 가사 노동시간을 계산해 봤더니 자신이 더 많이 했다고 한다. 부인은 지금 경남이주민센터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간혹 강연도 하고 있다. 황 원장은 “스웨덴에서 맞벌이하면서 아이 셋을 키울 당시에는 5분의 시간도 서로 조절했다”며 “한국 여성들은 ‘밖에서도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일해야 하는 이중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육아와 가사는 사회적인 남녀평등 문제가 걸린 중요한 문제지만 한국에서는 이슈화도 잘되지 않고, 정책적인 복지문제로도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현실은…

육아휴직자 중 남성은 4%뿐

男 가사 순위 선진국 바닥권

저출산·경단녀 등 경쟁력 저해

황선준, 레나황 부부. 황 원장은 한국에 와서 퇴근도 늦고 더 바빠졌지만 집안일은 여전히 절반 정도 분담한다며 “정신 없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가정이야말로 인생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황선준, 레나황 부부. 황 원장은 한국에 와서 퇴근도 늦고 더 바빠졌지만 집안일은 여전히 절반 정도 분담한다며 “정신 없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가정이야말로 인생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황 원장이 답답해하는 한국의 가정 상황은 통계적 비교로도 확인된다. 한국 남편들의 집안일 분담 비율이 북유럽 국가의 절반 수준이다.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동향 2014’ 보고서에 따르면 12개국의 만 20세 이상 기혼 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의 경우 응답자 절반 정도가 가사를 부부가 공평하게 분담하는 반면, 한국은 그 비율이 30% 정도에 불과했다. 한국 남편들의 가사노동 순위(식사 준비, 세탁, 집안 청소, 장보기, 아픈 가족 돌보기, 소소한 집안 수리 등 6개 항목)는 일본과 함께 선진국 가운데 꼴찌 수준이다. 물론 육아는 더 심각하다. 거의 전적으로 여성에게 맡겨져 있고, 국가 지원 역시 선진국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스웨덴만 하더라도 유급 육아휴직 480일 동안 부부가 의무적으로 나눠 써야 하며, 봉급의 80%를 받는다. 받는 급여를 낮추면 기간도 연장할 수 있다. 우리는 고작 1년에 임금의 40% 수준이다.

사실 남성의 육아경험은 안정적 가정 유지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자녀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여성가족부의 ‘꽃보다 아빠’ 사례집을 보면 ‘육아나 가사는 부부 중 어느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라 함께 해나가야 하는 과정’으로 인식한 후 부부 관계가 더 좋아졌으며, 아이와 더 친밀해지는 과정에 큰 행복감을 느꼈다는 소감들을 전하고 있다. 남성의 육아휴직 경험은 가정생활 만족도를 높이고 부인의 직장생활을 적극 지원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기혼남성의 육아휴직은 전체 육아휴직의 4.5%(지난해 기준 3,421명)에 그친다. 엄마를 대신해 육아휴직 의지를 가진 기혼남성이 늘고 법적으로도 뒷받침되고 있지만 시작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인식이나 기업문화가 따라주지 못하는 탓이 크다. 버젓한 공기업에 다니는 정모(34)씨는 육아휴직을 하려다 상사에게 제정신이냐는 훈계를 들었다. 정씨는 “육아휴직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백안시 하는 직장분위기에 다시 말을 꺼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인식이 이처럼 사회 구조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지만 여성의 과도한 가사, 육아부담이 국가적 문제에 미치는 영향은 간단치 않다. 세계 꼴찌인 출산율(1.25명)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일이냐 가정이냐’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큰 요인이 되고 있다. 15~54세 기혼여성 956만 여명 중 임신, 출산, 육아 등의 사유로 직장을 그만 둔 경단녀(경력단절 여성)는 20.7%인 197만7,000명에 달한다. 25~29세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이 남성과 엇비슷하지만 30대 후반부터 40대에 이르는 본격 육아기에 현격히 비율이 낮아진다. 여성경제참가율은 57%로 OECD 회원국 평균(62.8%)보다 낮은 최하위권(30위)이다. 가뜩이나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국가경쟁력을 더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정부가 경단녀 문제 해소를 위한 여러 정책을 마련 중이지만 뚜렷한 돌파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방한한 스웨덴 통계석학 한스 로슬링 카롤린스카의학원 교수는 “여성들에게 일도 잘 하고 가정 일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지워서는 출산율을 높일 수 없다”며 남녀 역할이 보다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일ㆍ가정 양립이 국가경쟁력은 물론 삶의 질과 국민행복과 연결되는 복지이지만 국민의식과 제도를 개혁하는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이선형 연구위원은 “일ㆍ가정 양립을 위해서는 가정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경우는 턱없이 적다”며 장시간 근무 업무량 과다 등 한국의 고질적인 기업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만 8살 이하 자녀를 둔 서울의 30~40대 남성 1,000명을 조사한 결과 일과 가정의 양립이 잘 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노동시간이 길고 업무량이 많기 때문’(48.5%)이라고 응답했다.

황 원장은 “한국에서는 일이 많아서 퇴근이 늦은 경우도 있지만 일이 없어도 밖으로 도는 남편도 많은데 가정이 인생의 중심이 되도록 균형을 찾아야 한다”며 “유연근무제 등 스웨덴처럼 가족친화적인 사회제도들도 확산돼 가정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지은기자 c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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