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아침을 열며] 그 많던 녹색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입력
2017.04.05 15:31
0 0

봄이 왔다. 봄이 반가운 이유는 무엇보다도 겨울 내 칙칙했던 땅과 나무들을 뒤덮는 녹색의 빛깔들이다. 수년 전 우리는 녹색으로 둘러싸인 시기를 보낸 적이 있다. 환경에서, 에너지에서, 그리고 산업 부문에서도 녹색성장이라는 개념은 대표적 국정과제로 논의되었다. 아마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이 녹색 담론을 세계에 먼저 꺼내기 시작했다. 간만에 가슴 뛰는 사명감을 부여 받은 관료와 전문가들은 숨가쁘게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구상했다.

그러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부 각 부처는 앞다투어 녹색 지우기에 나섰다. 미처 녹색이라는 이름을 떼지 못했던 부서들은 평가에 있어서 최하위권을 도맡았다. ‘녹색’이라는 말 한마디면 예산과 조직이 뚝딱 해결되는 도깨비방망이 같았던 신성불가침 인식은 금세 금기로 반전했다. 녹색이라는 단어는 주홍글씨로 읽혔고, 과거 정권의 흔적으로 낙인 찍혔다. 녹색성장 관련 부서는 힘이 빠지고, 그 멋진 홈페이지와 자료들도 초라해졌다. 졸지에 집을 나서는 홍길동 신세가 되어버린 정책 담당자들은 ‘녹색을 녹색이라 부르지 못하는’ 현실에 난감해했다. 세종시에서는 녹차도 마시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았다.

대부분의 정치체제에서 신정부는 구정부의 그림자를 최대한 지우려 한다. 주어진 시간이 제한된 경우에는 더더욱 그 속도와 강도가 빠르기 마련이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엄중한 목소리로 지난 정권의 정책은 모두 잊으라 외치고, 반복된 학습효과를 통해 일부 눈치 빠른 공직자들은 미리 스스로를 탈색하기도 한다. 얼마 전 종영된 TV드라마에서 저승사자는 이승의 기억을 지워주는 망각의 차를 망자에게 권한다. 그런 망각의 정치를 우리는 그 동안 너무나 당연시했다. 비단 녹색뿐이랴. 언제부턴가 우리 주위에서는 ‘햇볕’이 사라졌고, 곧 ‘창조’도 사라질 운명에 있다. 아름다운 우리 국어는 주기적으로 사전에서 사라져 간다.

하지만 정치적 망각의 과정은 남겨두어야 할 부분과 지워버려야 할 부분을 세밀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가진 게 그리 많지도 않은 나라에서 수천억~수조원의 예산이 투입된 사업들을 정리하는 과정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시장에서 콩나물 가격을 꼼꼼히 비교하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전자제품을 사면서 몇 천 원짜리 쿠폰 하나 더 받기 위해 밤잠을 설치는 근검한 나라에서, 망각의 차를 마시면서 지워버리는 정책 비용은 의아하리만큼 크고 대범하다. 그리고 나서 정부는 또 새로운 신화를 쓰기 위해 전보다 더 큰 예산을 편성하고 그에 걸맞는 멋진 이름을 붙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짤지 모른다.

비록 한동안 녹색이라 떳떳이 말하지는 못했어도 에너지 전환과 지속 가능한 발전은 우리 세대의 변함없는 숙명이자 과제이다. 과잉 의욕과 홍보가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녹색성장이라는 틀에 엮일 필요가 없는 일련의 사업들까지 황소개구리처럼 자리잡음으로써 부풀려진 숫자는 분명 제자리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색성장전략은 한국의 에너지와 기후변화 정책을 한 단계 끌어 올렸음에 틀림없다. 글로벌녹색성장기구(GGGI)와 녹색기후기금(GCF)을 한국에 유치했고, 녹색기술센터(GTC)를 비롯한 일련의 기구들이 여러 사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얼마 전 해외 출판사로부터 녹색성장 핸드북에 들어갈 한국의 사례를 집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녹색성장 플랫폼이 아직 국제사회에서 잊혀지지 않은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기로에 놓인 한국의 녹색 담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더 늦기 전에 전생의 기억 중 좋은 것들을 골라 환생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봄이 되어 새로 피어나는 녹색들처럼 업그레이드된 녹색성장 전략의 재구성을 고민해보아야 할 시기에 와 있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