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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등록 : 2018.02.09 18:51
수정 : 2018.02.09 21:17

[메아리] 이토록 무성의한 판결문이라니!

등록 : 2018.02.09 18:51
수정 : 2018.02.09 21:17

이재용 항소심 판단만 있고 근거는 불충분

집행유예 이유도 양형 기준 거슬러

이러고도 과도한 사법불신 탓하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 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구속 353일 만이다. 류효진 기자

판결문을 읽어보자, 꼼꼼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판결을 둘러싼 거센 논란을 지켜보다 든 생각이다.

재판 결과를 분석한 기사들을 훑어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아서다. “국민들이 바라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라는 호들갑에도,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란 막말에도 귀를 닫고, 판결문을 폈다. 지독한 감기로 지친 심신 탓에 판결문에 흔한 난해하거나 난삽한 문장들 사이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 비싼 밥을 든든히 챙겨먹고 빨간 펜을 집었다. 결과가 국민 다수의 법 감정과는 동떨어졌다 해도, 전 국민적 관심에 더해 해외에서도 주목한 재판의 무게에 값하는 탄탄한 논거를 발견한다면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리라 다짐하며.

A4용지 166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정독하고, 판단과 결론을 거듭 살폈다. 결론부터 말하면 비싼 밥값이 아까울 만큼 허탈했다. 그 많고도 첨예한 쟁점들과 양형에 이르기까지, 일도양단의 판단만 있을 뿐 그러한 판단을 뒷받침하는 근거나 논리는 없거나 충분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1심이 유죄로 인정한 뇌물공여 가운데 가장 액수가 큰 제3자 뇌물공여(재단ㆍ영재센터 출연)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제3자 뇌물공여죄의 구성요건인 부정한 청탁의 대상으로서 포괄적 현안, 즉 ‘이재용으로의 경영권 승계작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어 피고인 측의 명시ㆍ묵시적 청탁도 없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승계작업’을 인식했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등에서 만든 승계작업과 관련한 문서 같은 촘촘한 증거들은 “추론에 근거한 의견서” 등의 이유로 간단히 내쳤다.

특히 대통령의 지시 등을 꼼꼼히 기록한 ‘안종범 업무수첩’은 아예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례 하나를 언급했을 뿐인 이 논리가 맞다면 국정농단과 관련한 숱한 재판들에서 정황증거로 인정된 것은 어찌 이해해야 할까.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지적처럼 ‘스모킹 건’을 휴지조각으로 만듦으로써 실체적 진실을 외면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판결문에는 정유라에게 제공한 마필 등의 용역대금 36억여원과 더불어 뇌물공여로 인정한 말 사용에 따른 이익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불상’으로 처리해 결과적으로 횡령액을 줄인 것, 청문회 당시 피고인이 ‘기부’와 ‘지원’의 의미를 구분해 답변했을 가능성을 애써 배려함으로써 위증죄 인정 범위를 축소한 것 등 엉성하기 짝이 없는 대목들이 숱하다.

더 큰 문제는 양형이다. 양형 기준에는 형량뿐 아니라 집행유예 기준도 포함돼 있다. 재판부가 애써 강조한 ‘적극적인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한 경우’와 ‘전과 없음’은 긍정적 사유이나, ‘뇌물액이 5,000만원 이상인 경우’와 ‘3급 이상 공무원에 대한 뇌물공여’ 등 부정적 사유도 있다. 집행유예를 선고하려면 더 그럴듯한 논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판결문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이토록 무성의한 판결문을 내놓을 수 있다니! 의문은 법정 밖에서 풀렸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정형식 부장판사는 “법리는 양보할 수 없는 명확한 영역이었고 고민할 사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 오만에 기겁해 눈을 씻고 다시 읽었다. 더 놀라운 건, 가장 고민했다는 석방 결정과 관련해 “어느 기업인이 대통령 요구를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대목이다.

판사가 깊이 고민했어야 할 것은 전지적 작가 시점 소설의 문구처럼 “박 전 대통령의 질책과 요구의 강도가 어떠하였는지 짐작”하는 일이 아니다. 그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벌인 범죄행위의 위법성을 엄정히 판단해 그에 값하는 벌을 내리는 것이다.

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는 말이 수긍할 수 없는 논리까지 ‘닥치고! 수긍’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판결은 시민들의 생각과 주장이 모이고 다시 퍼져나가는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판결은 광장에서 시민들의 대화나 토론의 주제가 되어야 하고, 광장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다시 법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대화와 토론의 주제는 판결의 결론, 즉 누가 이겼고 졌는지에 그쳐서는 안 된다. 시민이 수긍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판사가 결론에 이르는 근거와 논리, 생각의 흐름이다.”(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의 판결비평서 ‘공평한가?’ 서문)

전국의 법관들이 이 판결문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공개 비판이 아니어도 좋다. 법과 양심에 따라 스스로 묻고 답한 결과를 가슴에 깊이 새겼으면 한다. 이 판결은 과연 공정한가? 공평한가? 땅에 떨어진 사법신뢰를 회복하는 길이 거기에 있다.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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