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때 체스 배워 어른 이겨
고등학교 졸업 후 게임회사 취업
비디오게임 개발 잇따라 대성공
뇌과학 연구해 ‘딥마인드’ 설립
알파고, 이세돌 누르며 AI 신드롬
“나는 로봇은 생각하지 않는다
AI를 과학에 이용하고 싶을 뿐”
소년의 부모는 작은 장난감 가게를 운영했다. 그 덕에 웬만한 장난감에는 흥미조차 느끼지 못했던 네 살 소년은 어느 날 아버지와 삼촌이 체스 두는 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아버지에게 체스를 배운지 2주 만에 소년은 어른들과의 체스 대결에서 잇따라 승리를 따냈다. 체스 신동의 탄생이었다.
소년은 체스 대회에 참가해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불과 다섯 살 때 영국 전역을 무대로 치러진 8세 미만 아동 체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아홉 살 때는 11세 이하 체스 국가 대표팀 주장을 맡았다. 열세살에는 세계 유소년 체스 2위 자리에 올랐다.
특기이자 취미가 체스뿐이었던 그는 8세 때 체스의 도움을 받아 ‘운명의 짝’을 만나게 된다. 체스 경기에서 이겨 받은 상금 200유로로 ‘ZX스펙트럼’이라는 컴퓨터를 구입한 것이다. 컴퓨터만 있으면 원하는 프로그램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데 매료된 그는 매일 컴퓨터 서적을 끼고 살며 프로그래밍을 연구했다. 열한 살 때는 컴퓨터와 사람이 일대일 대결을 하는 게임을 만들었고, 이 프로그램은 그의 동생을 이겼다. 이것이 훗날 인간을 꺾고 신의 경지에 오른 바둑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의 시초였을지 모른다.
‘알파고의 아버지’ 데미스 하사비스(41)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의 어릴 적 이야기다.
체스 신동, 천재 게임 개발자가 되다
하사비스는 1976년 그리스인 아버지와 중국계 싱가포르인 어머니 사이에서 4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부모는 모두 ‘보헤미안처럼 예술적 소양을 지닌’ 교사였고, 여동생은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남동생의 전공은 작문이었다. ‘기술’이라고는 발 붙일 틈이 없을 정도로 예술적인 분위기가 충만했던 가정에서 자란 하사비스는 스스로 “‘검은 양’과 같았다”고 말할 만큼 특이한 존재였다.
비범했던 하사비스는 또래와도 다른 길을 걸었다. 남들보다 2년 빠른 15세에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가 택한 건 명문대 진학이 아닌 게임회사(불프로그 프로덕션) 취업이었다. 이 곳에서 하사비스는 이용자가 직접 놀이공원을 꾸미고 경영하는 내용의 비디오 게임 ‘테마파크’를 개발했다. 그의 나이 불과 17세 때였다. 테마파크는 출시 이후 전 세계에서 1,500만개 이상 판매되는 대기록을 남긴다.
4년여 간 게임 개발에 매진했던 하사비스는 돌연 케임브리지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해 1997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하사비스의 선택은 다시 게임업체였다. 불프로그 프로덕션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피터 몰리뉴가 차린 게임사에 합류한 그는 게임 ‘블랙앤화이트’를 만든다. 블랙앤화이트는 이용자가 직접 신이 돼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동물 아바타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내용으로 지금까지도 ‘갓(신) 게임’의 대명사로 불린다. 게임 개발에 집중했던 하사비스의 관심이 인공지능 개발로 옮겨간 게 이때쯤이라고 한다.
1998년 하사비스는 아예 엘릭서 스튜디오라는 게임 개발사를 설립했다. 그의 회사는 마이크로소프트(MS)같은 유명 업체와 유통 계약을 맺고 직원 수가 60명으로 불어날 만큼 승승장구했지만, 거대 기업과 손잡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독립 개발사의 어려움을 절감했던 그는 스스로 회사를 접었다.
인공지능 개발 위해 다시 학교로
게임 업계를 떠난 하사비스는 2005년 인공지능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인공지능 개발을 위해서는 먼저 사람의 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들어가 인지신경과학(뇌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2009년 그는 기억과 상상이 뇌의 같은 부분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이언스지는 이 발견을 2007년 세계 10대 과학 성과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컴퓨터공학과 뇌과학을 배운 그가 인공지능 신생벤처기업(스타트업)을 설립하는 건 예상된 수순이었다. 하사비스는 2010년 런던에서 죽마고우인 셰인 레그,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 만난 무스타파 술레이만과 ‘딥마인드’를 만든다. 케임브리지대 동문이자 엘릭서 스튜디오 공동 설립자였던 데이비드 실버는 수석 연구원으로 영입했다. 회사의 설립 목적은 ‘지능을 사용해 다른 모든 것을 해결하자’로 정했다.
딥마인드는 설립 3년 만에 인공지능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013년 ‘DQN’을 내놓으면서다. DQN은 고전 비디오 게임인 ‘아타리2600’ 속의 46가지 게임을 사람처럼 수행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다. 아타리2600 속 장애물은 난이도가 낮은 편이었지만,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는 것만으로 화제가 됐다.
전도유망했던 딥마인드는 이듬해인 2014년 구글에 인수된다. 회사 이름도 딥마인드에서 구글 딥마인드로 바뀌었다. 딥마인드는 구글이 보유한 방대한 데이터를, 구글은 딥마인드의 AI 기술력을 갖게 됐다. 당시 인수 금액인 4억파운드(약 5,750억원)는 아직까지도 구글이 유럽 스타트업을 사들이면서 지불한 역대 최고액으로 남아 있다.
그의 꿈은 AI 활용한 과학발전
“승리! 우리는 달에 착륙했다.”
하사비스는 지난해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이 벌인 ‘세기의 대국’에서 알파고가 첫 승을 거둔 직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렇게 글을 올렸다. 바둑에서 인공지능이 인간 최고수를 꺾은 건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 비견할만한 업적이라고 평가한 셈이다. 하사비스는 대국을 4승 1패로 마친 뒤 ‘서울에서 알파고와 함께 배운 것’이라는 글을 통해 두 가지의 깨달음을 전했다.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인공지능에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인간의 성취라는 것이다. 하사비스는 “바둑 대결에서 인간과 기계가 맞서는 것으로 묘사됐지만 알파고는 결국 사람의 창조물”이라고 강조했다. 에릭 슈미트 알파벳(구글 모기업) 회장도 같은 맥락에서 “누가 이기든 인류의 승리”라고 말했다.
최근 알파고가 바둑 세계 랭킹 1위인 중국의 커제(柯潔) 9단까지 물리치면서 인류는 AI의 막강한 힘을 다시 확인했다. 동시에 AI 발전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다. 딥마인드의 초기 투자자였던 엘론 머스크 테슬라 CEO조차 “인공지능의 발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인공지능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 인류에게 이로울지, 해로울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듯, 하사비스는 ‘인간과 AI의 공존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이 열렸던 지난해 3월 하사비스가 미국 IT 매체 ‘더 버지’와 가진 인터뷰는 AI에 대한 그의 생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로봇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과학에 사용하고 싶다.” 인공지능이 방대한 양의 데이터 속에서 일정한 구조를 찾아내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힘들고 단조로운 일을 대신해주면, 인간 과학자들은 연구 성과의 중대한 돌파구를 더 빨리 찾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새로운 입자 발견에 인공지능이 참여하게 되는 날을 상상해 보라. 정말 쿨하지 않은가.”
이서희 기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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