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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표·아빠표의 매운 맛을 보여주마”

입력
2016.04.0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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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 A씨는 국회의원 선거공보물을 뜯어보다가 고민에 휩싸였다. 보고 또 봤지만 어떤 후보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딱히 살 것도 없는데 유효기간 만료인 공짜 쿠폰을 든 심정이 꼭 이와 같았다. 정권을 심판해야 할지, 분열한 야권을 심판해야 할지, 아니면 투표거부로 정치혐오를 표출해야 할지 도통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며 스마트폰을 집어든 A씨. 그때, 우주의 섬광보다 강렬한 뉴스 헤드라인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일본 죽어라” 외치는 엄마들… 보육대란, 7월 선거 최대 현안으로’. 보육원 탈락으로 아이를 맡길 수 없게 된 30대 워킹맘이 “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죽어라”는 독한 제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면서 촉발된 일본의 보육대란 논쟁을 다룬 기사였다. “누가 올린 글인지 알 수 없다”는 아베 총리의 말에 분노한 엄마들이 “(글을 올린 사람이) 나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수만 명이 동참한 서명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아베정권이 화들짝 놀라 보육시설 대기 아동 문제와 보육교사 급여 인상 등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게 선거고, 정치 아닌가요? 저도 이번 선거에서는 보육 정책 중심으로 후보들을 살펴보려고요.” A씨는 “올 초 누리과정 예산 때문에 난리가 났을 때 한국 엄마들은 너무 얌전했던 것 같다”며 “우리를 우습게 보지 않도록 조직된 엄마들의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선거는 대체로 패키지 상품이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부분 해체도 방법이다. 엄마, 아빠라면 이번 선거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심판할 수 있다.

‘초등입학휴직제’부터 ‘아빠 의무휴직제’까지

일단 주요 정당들이 내놓은 보육 관련 공약들을 살펴보자. 보육대란 단골 이슈인 누리과정 예산 지원문제는 여와 야가 극명하게 갈렸다. 새누리당은 관련 공약이 없는 반면 야3당은 표현 수위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중앙정부 책임을 확대, 강화하는 공약들을 내놨다. 더불어민주당은 “누리과정 보육예산 100% 중앙정부 담당”으로 확실하게 정부 책임을 못박았고, 국민의당은 “지방교육재정교부율 인상으로 국가책임 강화”, 정의당은 “지방교육재정교부율은 1% 올리고 특별교부금은 1% 낮추는 방식으로 누리과정을 국고지원”하겠다고 공약했다.

붙기만 하면 로또 당첨보다 감격스런 국·공립 어린이집도 중요한 이슈다. 믿을 수 있는 공공보육 시스템 구축은 출산지원금 같은 일회성 제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보육정책의 핵심이다. 안전하게 양질의 보육을 받으면서도 비용은 매우 저렴한 국·공립 어린이집은 엄마들에게는 ‘새끼 떼어 놓고 일하러 갈 만한’ 거의 유일한 수준의 보육시설이지만, 현재 전국 보육시설의 10.5%에 불과하다. 더불어민주당은 민간어린이집을 매입하거나 장기 임대하는 방식으로 이 비율을 30%까지 늘리겠다고 밝혔고, 국민의당은 주민자치센터 1개소당 1개 보육시설을 원칙으로 국·공립보육시설을 확충하겠다고 공약했다. 정의당은 지역별 불균형 해소에 초점을 맞춰 국·공립보육시설이 없거나 부족한 곳 위주로 확충하고, 읍·면·동에 설치된 국·공립어린이집 중 지역거점센터를 지정해 민간어린이집에 교재나 기자재, 놀이터 등을 개방키로 했다. 새누리당은 공립유치원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되, 국가 재정 및 환경 여건을 고려해 추진하고, 지역별 취원대상 아동의 인구 추이와 초등학생 수의 감소 등을 고려해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영·유아기 자녀를 직접 키울 수 있도록 해주는 육아휴직제도도 많은 당의 공약에서 대거 업그레이드됐다. 더불어민주당은 현재 통상임금의 40%를 지급하는 육아휴직급여를 100%로 올리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상한 150만원, 하한 70만원으로 한계가 있어, 만약 통상임금이 200만원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150만원만 받을 수 있다. 현재는 상한 100만원, 하한 50만원이다. 국민의당은 현재 40%인 육아휴직급여 비율을 50%로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정의당은 상한을 100만원에서 150만원, 하한을 50만원에서 80만원으로 가장 크게 인상한 공약을 제시했다.

출산휴가는 야3당이 일제히 강화된 공약을 내놨다. 더불어민주당은 현행 5일 중 유급은 3일뿐인 아빠의 출산휴가를 20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당은 엄마의 현행 출산휴가 90일을 120일로 늘리고, 아빠는 2주로 확대키로 했다. 정의당은 안정이 필요한 임신 초기에 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산전후휴가를 현행 90일에서 120일로 늘리는 공약을 내놓았다. 이에 더해 출산시 양육에 필요한 종합물품을 국가가 직접 지급하는 100만원 상당의 ‘핀란드형 마더박스 선물’도 공약했다. 가장 눈에 띄는 정의당의 공약은 아빠 육아휴직제도의 3개월 의무할당제 도입. 파파쿼터제 기간만큼 육아휴직 기간을 확대해 아이를 낳은 부부는 현재 최대 12개월인 육아휴직을 15개월까지 쓸 수 있게 했다.

제2의 육아 환란기가 시작되는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휴직할 수 있는 획기적 제도도 공약에 포함됐다. 가장 파격적인 것은 더불어민주당. 취학자녀의 학교생활 적응을 돕기 위한 3개월 유급 휴가제인 ‘취학아동돌봄휴직제’를 도입하겠다고 공약했다. 정의당은 가족볼돔휴가제를 신설하고, 현재 시행중인 가족돌봄휴직제에서 사업주가 거부할 수 있는 사유를 수정해 확대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새누리당은 학부모 학교참여활동에 대한 휴가제의 법제화를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워킹맘 위주의 보육정책으로 소외감을 느낄 수 있는 전업주부들에게는 국민의당의 양육크레딧제도가 피부에 와 닿을 듯하다. 국민연금 가입기간을 추가 인정해주는 크레딧제도를 양육에도 확대 적용키로 했다. 현재 국민연금 크레딧 제도는 둘째 아이 출산과 군 복무 단 2개 종류로만 운영 중이다. 국민의당은 출산크레딧은 첫째 아이부터 적용해주고, 양육에 대한 노동투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기회비용을 보전해주는 취지로 양육에까지 크레딧 적용을 확대, 국민연금 사각지대를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엄마 유니온은 왜 없나요?”

주요 정당의 보육정책을 일람했다고 해서, 곧장 마음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공약은 참 좋지만, 당이 영 내키지 않을 수도 있고, 지지하는 정당에서 온전한 공약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회의의 원인은 공약(公約)이 공약(空約) 아니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경험칙이다. 취학아동돌봄휴직제가 과연 도입될 것이며, 아빠 육아휴직 3개월 의무할당제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덜컥 뽑아놨더니 딴소리하는 꼴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안 지킨다고 해서 강제할 방법도 없다. 엄마들의 현실적인 요구를 정치에 반영하고 추동할 조직적 힘이 없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기도 힘들고, 내 봤자 파편화돼 산란할 뿐이다.

두 살배기 아들을 양가 도움 없이 ‘독박육아’로 키우고 있는 직장맘 남모(33)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유니온’을 결성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있는 열혈엄마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보육문제를 한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지 사회세력화해서 바꿔내자는 생각은 안 하는 거 같아요. 시민사회 조직 중 엄마, 아줌마들로 구성된 단체가 하나도 없는 게 이해하기 힘들어서 직접 만들어볼까 알아본 적까지 있어요. 청년문제나 노인문제는 청년유니온, 노년유니온 같은 조직이 생기고 나서 공론화가 많이 됐잖아요.” 남씨는 “국민의당 양육크레딧제도, 새누리당의 아이돌봄서비스 확대, 정의당의 아빠 육아휴직 의무할당제 도입, 더불어민주당의 취학아동돌봄휴직제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크든 작든 이익단체화하지 않은 집단이 없는 세상에서, ‘엄마유니온’만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다. 자녀의 주양육자를 엄마로만 국한해도 전체 유권자의 절반이 해당되고, 현재 양육의 과업에 매진하고 있는, 유·아동기 자녀를 둔 유권자만 해도 30·40대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들이 조직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한국 정치지형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육 담당 공무원 B씨는 그 이유로 “자녀의 연령대에 따라 엄마들의 요구가 다르고, 아이가 자라면 더 이상 그 이슈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자라고, 엄마들은 흩어진다는 얘기다. 국·공립어린이집 확충을 목청 높여 외치지만, 내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아무 상관 없는 문제가 되기 십상인 것이다. 계층별로도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층은 베이비시터를 쓰거나 학원을 보내는 식으로 해결하고, 그런 여력이 없는 취약계층은 정치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다. 여기에 전업주부 어린이집 이용시간 제한 같은 전업주부와 워킹맘을 이간질하는 정책이 온탕, 냉탕을 반복하면서 엄마들의 연대는 요원해지기만 한다. 오늘의 전업주부는 어제의 워킹맘이었건만 상호비방만 난무하고, 정치를 통해 일과 가정이 양립 가능한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과업은 아스라이 멀어진다.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은 더 이상 이렇지 않아야 한다’는 대승적 차원의 합의와 연대의식 없이는 엄마들의 정치세력화도 어렵다.

보육의 핵심 의제화에는 아빠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육아와 양육을 엄마들만의 이슈가 아닌 부모의 이슈로 확대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육아휴직 3년이면 경력단절 없다”는 게 평소 지론인 초등남매의 아빠 이모(42)씨는 이번 총선에서 보육정책을 꼼꼼히 살펴볼 계획이다. “정치 성향을 거스르면서까지 보육정책만 볼 수는 없겠죠. 하지만 우리나라도 맨날 이념 공방만 할 게 아니라 생활의 정치, 일상의 변화를 가져오는 정치를 주문해야 해요. 부모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더 많이 반영돼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학부모들이 끌어안고 사는 문제인 보육과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정치권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겠습니까?”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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