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전공한 사회적 기업가들 주민들과 협력해 장기 프로젝트
자기브랜드 상품 출시 등 작은 진전 주민들 자생력·자부심 높여
서울 종로구 창신동은 소규모 봉제공장이 밀집한 동네다. 3~5명 정도가 일하는 작은 봉제공장 980여개가 몰려 있어 드르륵 드르륵 미싱 박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바로 옆 동대문시장으로 창신동 옷이 들어간다. 서울 성곽의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잡아 비탈이 많은 이 동네의 언덕길에는 봉제공장과 동대문을 오가며 의류 원단 등 자재와 완제품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가 쉬지 않고 다닌다. 하수구마다 다림질 열을 빼내는 하얀 수증기가 피어 오르고, 옷 만들다 나온 자투리 천을 담은 대형 비닐봉지가 골목마다 널린 것도 다른 동네에는 없는 풍경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신윤예(30) 홍성재(32)씨는 창신동에서 활동하는 사회적 기업가 겸 예술가다. 이들이 공동대표를 맡아 운영하는 ‘000간’(공공공간)은 창신동 주민들과 협력해 창신동 제품과 주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국내 의류산업 불황에 생산 공장이 동남아 등으로 빠져나가고 일감도 줄어들면서 쇠락해가는 봉제마을 창신동을 문화예술을 통해 재생하는 것이 두 사람의 꿈이다. 000간이라는 이름에서 숫자 0은 비어 있으면서 다른 것들로 채워지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를, 간은 사이, 틈, 참여를 뜻한다.
창신동에서는 매일 평균 22톤의 자투리 천이 나온다. 두 사람은 쓰레기로 버려지는 자투리를 줄일 방도를 궁리한 끝에 최근 ‘제로 웨이스트 셔츠’를 선보였다. 재단할 때부터 버리는 자투리가 거의 없게 디자인한 이 옷은 창신동 봉제공장들과 협력해서 만든다. 6월부터 000간이 온ㆍ오프 라인으로 팔기 시작해 1차분 200벌을 모두 팔았고 현재 가을 제품을 준비 중이다. 판매 수익의 절반은 옷을 만든 주민들에게 돌아간다. 창신동 봉제공장은 1년의 반은 일감이 없는 비수기다. 제로 웨이스트 셔츠는 비수기를 극복할 대안으로 생각해낸 것이기도 하다. 000간은 자투리 천으로 방석과 에코백, 브로치도 만든다.
000간의 활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민과 함께, 주민의 필요를 바탕으로 움직인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그동안 공공미술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여러 지역에서 예술가들이 달동네에 벽화를 그리거나 조형물을 설치하고 떠났지만, 두 사람은 이런 뜨내기식 활동으로는 지역에 참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신씨는 “우리가 하는 일은 지역 문제 해결과 마을 재생을 위한 커뮤니티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홍씨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지역 산업과 주민들의 미래도 함께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두 사람은 2011년 1월 창신동에 들어왔다. 지역아동센터의 미술 선생님으로 와서 1년간 아이들과 지내면서 대부분의 부모들이 옷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온종일 일에 매달리다 보니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홍씨는 “예술교육을 하다가 지역의 고민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 재생으로 관심을 넓히게 됐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예술과 디자인으로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며 함께 좀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고 싶어한다.
000간이 올해 가장 집중하고 있는 사업은 ‘H 빌리지’ 라는 문화예술 지역 재생 프로젝트다. 현대자동차그룹, 한국메세나협회와 함께하는 이 사업은 창신동 지역의 자생력을 높이고 봉제마을 창신동을 브랜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홍성재씨는 “주민, 기업, 구청 등 여러 부문이 협력해야 하는 사업”이라고 설명하면서 “000간은 이를 위한 매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H빌리지 프로젝트는 이름 없는 봉제공장에 간판을 설치하는 ‘거리의 이름들’, 오르막이 많은 이 동네에 쉴 수 있는 평상을 설치하는 ‘거리의 가구들’, 창신동 마을산책 프로그램인 ‘도시의 산책자’, 세 가지로 이뤄져 있다.
마을 산책 프로그램은 000간이 지난해부터 해온 것인데, 봉제공장 하나하나의 이야기와 제품 등 마을을 소개하는 스마트폰 앱을 제작해 효과를 높일 계획이다. 방문자들이 창신동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올릴 수도 있게 만들 예정이다. 창신동에는 봉제공장만 있는 게 아니고 서울 성곽도 있다. TV 드라마 ‘씨크릿가든’ 여주인공의 옥탑방,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남녀 주인공이 거닐던 골목도 이 동네에서 찍었다. 000간은 창신동이 간직한 많은 이야기거리가 마을의 중요한 무형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봉제공장 간판은 10월까지 70개를 제작해 설치할 예정이다. 간판을 원하는 공장을 조사해서 함께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000간 맞은편 스커트 전문 봉제공장 이삭의 문간에는 미싱 부속으로 만들어 화분에 꽂은 이동식 간판이 놓여 있다. 지난주에는 지역 청소년들과 간판 제작을 위한 디자인 캠프를 했다. 공장들이 좁은 골목길에 있으니 걸리적거리지 않게 만드는 게 좋겠다 등 토론에서 나온 여러 의견을 반영해 다함께 간판을 만들었다. 신씨는 “창신동 봉제공장들은 대부분 간판 없이 일을 해왔기 때문에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간판은 아무 의미가 없다”며 “각 공장과 특화된 제품을 브랜딩해서 고부가가치 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H 빌리지 프로젝트는 창신동을 재발견하고 브랜딩하는 작업이다. 동대문 제품으로만 통하던 창신동 봉제공장 옷들이 저마다 자기 얼굴로 자생력을 갖게 하고, 주민들의 자부심도 높이려는 시도다. 여기에 관심을 갖고 자기 브랜드로 제품을 내놓는 주민도 생겼다. 20년 이상 작은 봉제공장을 해온 이가 ‘동대문 그 여자’라는 로고를 000간에 제작해달라고 요청해 에코백에 붙여 팔기 시작했다.
창신동을 사진 찍기 좋은 구경거리 벽화마을처럼 만드는 건 000간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보다는 마을의 정체성을 살리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로 가꾸는 게 목표다. 예술가로서 이들이 제안하는 새로운 공공성은 지역 재생의 바람직한 모델로 주목을 받고 있다. 1회성이 아니라 10년을 바라보고 펼치는 두 청년의 실험은 차근차근 전진 중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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