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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아버지의 죄가 더 크다

입력
2014.12.2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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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리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대한항공. 조양호(왼쪽) 한진그룹 회장과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지난 12일 기자들 앞에서 각각 사과를 하고 있다. 조 전 부사장은 지난 5일 뉴욕발 대한항공 일등석에서 승무원의 견과류 제공 서비스 문제로 사무장을 질책하며 항공기를 되돌려 사무장을 내리게 해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땅콩리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대한항공. 조양호(왼쪽) 한진그룹 회장과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지난 12일 기자들 앞에서 각각 사과를 하고 있다. 조 전 부사장은 지난 5일 뉴욕발 대한항공 일등석에서 승무원의 견과류 제공 서비스 문제로 사무장을 질책하며 항공기를 되돌려 사무장을 내리게 해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그날 밤 세 아버지는 분주했다. 열흘 전 서울 모 호텔 고급주점에서 벌어진 음주 폭행 사건이 발단이었다. 당시 종업원 3명이 다치고 유리창이 깨지고 집기가 부서졌다. 경찰은 사건을 덮으려 했다.

A 그룹 회장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의 심중은 이랬으리라. 막내가 사고를 쳤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고, 경찰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사건을 알고 있는 언론사는 아직 한 곳뿐이다. 어떻게든 신문에 나가는 일은 막아야 한다.

B 부장의 처지는 얄궂었다. 하필 아들이 큰 수술을 받는 날, 회장님의 아들을 구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병원 대신 해당 신문사 편집국에서 대기했다. “잘못을 인정하지만 제발 아버지의 맘을 헤아려 달라”고 읍소했다. 아들의 수술 경과를 챙기는 전화조차 눈치가 보였다. 그는 신문의 최종 인쇄가 끝날 때까지 기자들 곁을 지켰다.

C 기자는 언짢았다. ‘삼남 폭행 건’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제목의 경찰 수뇌부 보고용 첩보를 입수하고, 후배 기자를 시켜 일주일 넘게 탐문 취재한 끝에 밝혀낸 사건의 면면을 지면에 나가기도 전에 상대가 알고 있다니. “아들이 수술 중”이라는 B 부장에게 “내 아들도 콩팥이 한 개”라고 발끈했다. “최종 판 제목만이라도 바꾸면 어떠냐”는 신문사 경영진의 거듭된 부탁(?)에는 “한 자라도 고치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폭음했다.

기사는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나갔다. 모든 언론이 기사를 받았고,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A 회장의 아들은 당일 오전 공식 입장을 밝혔다.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저의 잘못이었다. 물의를 일으켜 가족과 주위 모든 분들께, 당시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

간결하고 신속한 사과에 여론은 점차 누그러졌다. 관련 기사거리가 더 있었지만 C 기자는 접었다. 사회적 지위는 다르지만 아버지라는 동등한 입장에서 아버지의 맘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밤 세 아버지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으니까. 적어도 힘이나 돈을 남용하지도(A 회장), 과잉충성으로 무리하지도(B 부장) 않았다.

‘땅콩 회항’ 사건에도 수많은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들도 최선을 다했다. 당사자의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버티다가 첫 보도 5일 뒤 사과했고, 회사 임원들은 최선을 다해 증거를 인멸하고 피해자를 협박했다. 국토교통부의 공무원들은 최선의 무능과 거짓말 릴레이를 선보였다. 조사를 맡은 항공안전감독관 16명 중 14명이 대한항공 출신이란 지적에 장관은 아무 문제 없다고 확언했지만 결국 그 중 1명이 검찰에 체포됐다. 누군가의 아버지였을 그들의 최선이 사태를 더 악화시킨 꼴이다.

재벌 자녀의 일탈로 바라보기엔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의 너무 많은 치부를 드러냈다. 근본은 아버지의 부재다. 최소한의 상식을 지킨 아버지를 찾아볼 수가 없다. 내 자식은 나 덕분에 누려도 된다는 오만, 적어도 내 아들딸은 회장 자식만큼은 아니더라도 남들보다 윗자리에 서길 바라는 욕심, 자녀에게 돈과 힘을 투입할 자리 보전을 위해 정의나 상식 따위 잠시 유보해도 된다는 착각이 사건 곳곳에 스며있다.

어쩌면 우리 역시 가정에서 제2의 조현아를 키우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제2의 조현아는 시공과 경중을 달리할 뿐 도처에서 목도할 수 있다. 물리력으로 급우를 괴롭히는 아이, 물질로 노인을 괄시하는 젊은이, 계급으로 하급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군인, 사회적 지위로 성추행을 하는 교수, 모두 누군가의 자녀들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돈과 권세, 말을 통해 배우지 않는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따라 배울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부자든 가난뱅이든 누구에게나 공평하면서도 두려운 직업이다. 우리는 아버지로서 떳떳한가. 조롱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더 버리느니 우리의 뒤를 살피자. 그게 땅콩 회항 사건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값진 교훈이다.

PS그날 밤으로부터 4년 뒤 A 회장은 경영일선에 복귀했고 아들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다. B 부장은 임원으로 승진했고 아들은 완쾌돼 군대에 다녀왔다. C 기자의 아들은 콩팥 하나로 아직 건강하다. 그러나 C 기자의 펜은 갈수록 무뎌지고 있다.

고찬유 경제부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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