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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이별학 개론

입력
2014.10.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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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했던 즈음, ‘나는 너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란 진술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한 적이 있었다. 듣는 사람으로선 억장이 무너지는 말이지만 그 반대의 진술 ‘너를 (지금은) 사랑한다’가 나이와 국경을 불문하고 어느 경우에든 금지될 수 없는 언명이듯이 ‘사랑하지 않는다’란 선언 역시 어떤 상황이든 나쁘다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에 빠지는 것에는 이유를 따져 묻지 않고 관대히 양해하는 반면, 나로부터 이제 그만 등 돌리는 사람에게는 책임과 납득할 만한 논리를 강퍅하게 요구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관하여는 한시적인 부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지금 이순간이고,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 역시 지금 이 순간에 한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두고 ‘앞으로는’ ‘그때는’ 이란 전제를 다는 것은 헛헛하고 쓸쓸한 공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같은 이유로 현재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과거의 진심마저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사랑에 관한 몰이해이자 모욕과 다름없다.

남녀 간 사랑은 매혹적이고 아찔하며 위험한 사건이다. 불안한 매혹의 상당부분을 안정적으로 거세한 제도가 ‘결혼’이라 냉소해 보지만, 긴 세월을 두고 서로가 풍화하여 함께 늙는 도정에는 사랑의 또 다른 범주화가 필요하겠단 생각도 든다.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진술만으로도 심장이 피를 내뿜는데 더군다나 여기 제 3자가 연루되어 있다면 더더욱 견디기 힘든 폭력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애초 이 비극의 시발은 삼각(三角)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잠복되어 있던 갈등부터이지 않았을까. 새로운 등장인물의 출현은 기존의 몰이해가 외연으로 발산되는 기폭이었지, 갈등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세 사람의 관계가 꼭지점으로 모두 연결되어있는 삼각형이 되는 것에 반대하고 싶다. 대신 기껏해야 일렬로 나열된 점선(옛연인-그-새연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있다면 그와 나 혹은 그와 새 연인, 당사자끼리 갈등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 그를 건너뛰면서 옛 연인과 새 연인끼리 할퀴고 충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양끝의 점이 붙어버리면 지지리 궁상맞은 신파로 비화되기 십상이고, 극도로 무력해진 가운데 점 역시 책임회피의 비굴한 처세를 선택할지 모른다.

“우리 왜 이제야 만난 거야.” 옛 연인의 굴레를 버거워하며 새 연인의 매력에 빠져드는 장면에 나오는 가장 전형적인 대사. 하지만 그 연분이라고 천생 내내 변치 않을 것인가. 다음 대상에게도 똑같이 읊을 수 있는 대사이자 허황된 세뇌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번 홀리면 맹목적으로 돌진하게 되는 속성, 즉 환각과 착란이 사랑이 가진 가장 큰 매혹이자 치명적인 함정이지 않을까. 누군가는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한 행복은 얼마나 위태로운가’라 일갈하지만, 건강한 충고는 아닐 것이다. 내 존재감(나는 이렇게 불행한데, 너희들이 어떻게…)을 억지로라도 시위하며 그들을 응징하려 하면 할수록 역설적이게도 내 역할은 주인공자리에서 초라한 조연으로 밀려나 버리기 때문이다. 내 손을 떠난 그들의 연극을 인정하는 것,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인생극의 주인공 자리는 나 자신이 사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생이 한판 연극이라면 그간 고착되어 있던 스토리와 등장인물을 한번쯤 쇄신할 수 있는 기회일지 모른다. 단 한꺼번에 갈아엎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고도 헛헛한 시도일테니, 지난 역사의 전면적인 부정이 아니라 이제껏 걸어온 연장선 위에서 다시 차분히 길찾기를 시작해보는 거다. 휘몰아치는 풍랑에도 선박의 조정키만은 사수할 수 있다면,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의 치명적 매력이 아니겠는가.

이제껏 사랑의 속성 중 단물이 나는 당의(糖衣)만 맛본 후에 내뱉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의가 사라져버린 사랑의 씁쓸함을 온몸으로 겪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대하는 태도와 깊이에 있어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사랑에 관하여 열심히 학습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건 정말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이 훈련을 어떻게 내면으로 받아들여 건강하게 외연으로 드러낼 수 있는지는 스스로에게 묻고 살펴야 할 일.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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