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합니다. 다 함께 새로운 빛을 밝힙시다.”
27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광장이 일시적으로 어두워졌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광장을 가득 채운 시민들이 잠시 촛불을 끈 것이다. 곧 이어 ‘시민과함께하는뮤지컬배우들’이 ‘빛’이라는 제목의 노래와 함께 공연을 시작하자 집회 참석자들은 서로의 촛불을 나누며 새로운 빛으로 다시 광장을 밝혔다. 박 대통령이 물러나는 날이 올 때까지 계속 광장에 나와 촛불을 켜겠다는 대동(大同)의 퍼포먼스였다.
첫 눈과 세찬 바람, 강추위도 촛불을 꺼뜨리지 못했다. 이날 청와대를 향해 정권 퇴진을 외치기 위해 광화문광장에 나온 시민은 150만명(경찰 추산 27만명). 부산 10만명, 광주 5만명 등 지역 참여자 40만명을 더해 190만명(경찰 추산 32만명)의 성난 민심이 거리로 쏟아졌다. 광화문광장은 물론, 남쪽으로 서울광장과 남대문, 동쪽으로 종각을 거쳐 종로 1가, 서쪽으로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까지 ‘하나됨’을 함께 하려는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끝도 없이 밀려 들었다. 단일 시민집회 사상 최대 규모였다.
“이제 민심 제대로 보여줄 것”
10도 안팎의 포근한 날씨 속에 치러졌던 1~4차 촛불집회와 달리 5차 집회가 열린 이날 아침은 짙은 눈발이 날리고 0~2도의 추위가 몰아쳤다. 그러나 시민들은 궂은 날씨에 아랑곳 않고 이른 아침부터 두꺼운 점퍼와 목도리로 무장한 채 서울 도심으로 모여 들었다. 지난 12일 100만 집회에 이어 다섯 살 딸의 손을 잡고 광화문광장을 찾은 박종희(38)씨는 “박 대통령은 날이 추워지면 국민의 분노가 수그러들 줄 아는 것 같다”며 “이럴 때일수록 단단한 민심을 보여주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나왔다”고 말했다.
추위만큼 분노는 매서웠다. 전남 순천에서 올라온 고교생 김수빈양은 이날 본 집회 자유발언대에 올라 “박 대통령은 일반인에게 국정을 맡긴 것도 모자라 한 달 넘게 민심까지 무시하면서 대통령의 의무를 져버렸다”며 “이제 더 이상 박근혜은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라는 진짜 민심을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소리쳤다.
시민들은 여전히 평화집회를 억누르는 공권력에 크게 실망한 모습이었다. 전날 저녁 경찰이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들의 트랙터 상경을 물리력을 동원해 막은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최모(58)씨는 “어제 새벽에 양재IC에서 농민들이 경찰 진압에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너무 슬펐다”며 “노래와 공연으로 평화롭게 화를 표현하는 민중의 소리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백약이 무효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본 집회에서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더욱 적극적인 시민불복종 운동을 확산시켜 박 대통령 퇴진을 압박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국대학생시국회의 공동대표인 안드레 동국대 총학생회장은 “박근헤 정권의 부패와 비리를 멈추기 위해선 하던 일을 멈추고 거리로 나서야 한다”며 “우리 대학생들은 동맹휴업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을 멈출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역시 “30일 있을 총파업은 민주노총만의 것이 아니다. 국민들도 당당하게 부정한 나라에 불복종을 선언하고 함께 해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청와대 200m 앞까지 행진… “이길 수 있다”
본 집회 앞서 시민 35만명은 오후 4시부터 율곡로와 경복궁역 사거리를 지나 청와대 쪽으로 북상했다. 전날 법원 결정으로 서쪽(신교동로터리) 동쪽(세움아트스페이스) 남쪽(율곡로)에서 시민들이 청와대를 포위하는 대규모 집회가 허용되면서 사상 최초로 청와대에서 200m 떨어진 청운효자동주민센터까지 행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민들의 발걸음은 청와대 코 앞에서 가로막혔으나 참석자들은 조금씩 승리해 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디자이너 유모(29ㆍ여)씨는 “비록 법원이 오후 5시30분이라는 시간 제한을 뒀지만 내자동로터리 너머 행진을 아예 허가하지 않던 이전에 비하면 정말 다행인 결정” 이라며 “법원이나 정부 내부에서 이런 식으로 힘을 실어줄수록 국민들 역시 서서히 전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본 집회에서 가수 양희은의 ‘상록수’를 따라 부르던 주창희(75)씨는 “오늘은 ‘끝내 이기리라’는 노랫말이 유독 와 닿았다. 청소년과 대학생 등 젊은이들이 거리에 나와 부도덕한 정권을 꾸짖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정말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든다”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전국민 함께 ‘저항의 1분 소등’도
집회를 주관한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각자의 자리에서 마음으로 응원하는 시민들을 위해 오후 8시 ‘저항의 1분 소등’ 시간을 가졌다. 8시 정각이 되기 10초 전부터 참석자들은 일제히 카운트다운을 외친 뒤 촛불과 휴대폰 불빛을 껐다. 130만명이 절규를 토해내던 광화문광장 일대는 일순간 암흑과 정적에 휩싸였다. 광장 주변 가로등 불빛과 정부서울청사, 마이크로소프트 본사 등 인근 건물의 불이 꺼지지 않자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불 꺼라!’를 외치기도 했다. 광화문 일대 카페와 식당에 있던 시민들도 불이 꺼지지 않자 내부에서 소등을 권했다.
본 집회가 끝난 오후 8시20분 다시 대이동이 시작됐다. 참석자들은 광화문광장을 출발해 8개 경로로 나눠 청와대로 향하는 2차 가두행진을 이어갔다. 청와대 방면 행진은 일몰 이후 금지된 탓에 시위대는 자하문로 중간 지점인 통인로터리에서 멈춰서야 했다. 당초 행진 종착지는 내자동로터리까지였지만 1차 행진 때 철수하지 않은 이들이 남아있어 구간이 좀 더 늘어났다.
겹겹이 쌓인 경찰버스(차벽)에 가로 막히자 시민들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자동로터리 앞에서 자유발언을 하고 ‘박근혜 구속하라’ ‘행진을 허용하라’ 등 구호를 외쳤다. 경기 용인시에서 온 한 시민은 “아무 말도 못하는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딱 한가지,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시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꼭 밝히라고 말하고 싶어 올라왔다”며 “경찰은 박근혜와 비아그라 대신 시민을 보호하라”고 일갈했다.
청와대와 한층 가까워져도 시민들은 질서를 지키며 평화집회의 면모를 이어갔다. 내자동 로터리에 정차한 경찰버스에 붙어 있는 ‘주차위반’ ‘박근혜 퇴진’ 등 스티커룰 경찰과 시민이 합심해 떼어내는 장면도 포착됐다. 흥분한 일부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유리병과 초코파이를 던지자 “던지지 마세요” “폭력은 안 돼요”라는 제지가 뒤따랐다.
오후 10시 넘어 비가 흩뿌리기 시작하면서 시위대 대부분은 한 시간여 뒤 광화문광장으로 돌아가 새벽까지 자유발언을 하며 1박2일 밤샘 축제를 이어갔다. .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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