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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의 원수 갚은 47人 집단할복… 日 '사무라이 판타지’로

입력
2015.12.1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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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복 직전인, 영화 '47 로닌'의 마지막 장면.
할복 직전인, 영화 '47 로닌'의 마지막 장면.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47 Ronin(칼 린쉬 감독, 2013)’은 말 그대로 액션 ‘판타지’영화다. 감독이 가장 욕심 부려 찍은 듯한, 가장 화려하고 자극적인 집단 할복 장면이 대표적이다. 저 사건, 즉 주군을 잃고 당연히 봉토마저 빼앗겨 오갈 데 없어진 47인의 사무라이가 주군을 죽게 한 원수의 목을 벤 것은 1702년 12월 14일 밤이었고, 할복한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영화에서처럼 에도의 난만한 벚꽃 아래에서 흩날리는 꽃 비를 맞으며 배를 가르지 않았다. 눈발이 흩날렸을 수는 있겠다.

그로부터 백 년 전인 1603년 3월,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에도 바쿠후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부의 승인 없이 영주들이 칼을 드는 것을 금했다. 하물며 에도성 내에서 무단으로 무력을 쓰는 짓은 신분과 사연을 막론하고 목숨을 내놔야 할 범죄였다.

고베 아코우(赤穗) 지방의 성미 급한 영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바쿠후의 의전 담당관이던 키라 요시히사와 말다툼 끝에 칼을 뽑아 부상을 입힌 1701년 3월에도 에도의 법도는 서슬 같았다. 바쿠후는 아사노에게 할복을 명했고, 아코우번을 직할령으로 복속했다. 졸지에 소작 줄 땅(수입)을 잃게 된 가신 무사들은 주군의 뒤를 따르는 대신 고난과 모욕을 감내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들이 47명이었고, 이듬해 세모에 키라의 저택을 습격한 거였다.

당시의 시대정신은 유학(주자학)이었다. 그들은 칼을 듦으로써 법을 어겼지만, 동시에 충의라는 유학의 이념과 사무라이의 절개를 완성한 셈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법 통치와 전근대적 윤리 이념의 충돌 사이에서 바쿠후의 지배자들은, 현대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꽤나 당혹스러웠을지 모른다. 그 고민 끝에 바쿠후가 내든 선택이 할복이었다. 처벌은 하되 무사의 치욕으로 여겨지던 참수형이 아니라, 패자의 명예와 자존심을 존중하는 자진의 형식.

47인의 사무라이 사연을 담은 일본 민화
47인의 사무라이 사연을 담은 일본 민화

저 사연은 일본 근대 정치ㆍ문화사의 꽤 뜨거운 연구 주제가 됐다. 어떤 학자들은 형벌인 동시에 충절에 대한 훈장도 되는 저 할복의 판결에서 폭력의 독점기구로서의 근대적 국가의 맹아를 찾기도 하는 모양이다. 에도의 시민들은 당연히 저 무사들을 기렸다. 사연은 입으로 전해지고, 인형극 등으로 재현되면서 ‘추신구라(忠臣藏)’ 라는 고전이 됐다. 린쉬 감독은 저 일본 사무라이 시대의 민중적 판타지 위에 꽃잎을 뿌렸다.

센가쿠지(泉岳寺) 주군의 무덤에 원수의 목을 바친 무사들은 절 마당에 무릎을 꿇고 바쿠후의 처분을 기다렸다고 한다. 할복 명령이 곧장 떨어진 것을 보면 조정의 고민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리 무거웠던 것 같지는 않다.

할복은 1873년 메이지 천황령으로 공식 폐지됐다. 하지만 저 잔혹한 판타지는 끈질기게 남아, 판타지로도 재현되고, 흉내 내는 이들도 있고, 2차대전의 카미카제로도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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