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월급쟁이인 적이 있었다.유랑극단 생활에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1968년 캐비닛과 철제 서류함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한 것이다.
먼 친척 뻘 되는 아저씨가 운영하는 회사였는데 박봉이나마 고정급이 있으니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상계동에서 태릉 불암산 밑으로 이사한 것도 이 무렵이다.
아내는 결혼 후 처음으로 밥상을 장만하고 당시 장롱 중 최고로 쳤던 캐비닛도 들여놓자 여한이 없다며 울먹였다.
그렇게 착실하게 살던 1971년 가을이었다.
을지로 본사로 발령받은 후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러 가고 있는데 누군가 내 등을 딱 쳤다.
“야, 이게 누구야? 주일이 너 몰라보게 변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나와 호흡을 맞춰 무대에 섰던 코미디언 방일수(方一秀)씨였다.
그 역시 은행원으로 변신해 있었는데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부추기기 시작했다. “요즘 월남 가면 떼돈 번다더라.” 나는 그날로 직장에 사표를 냈다.
이렇게 해서 베트남에는 두 차례 위문공연을 다녀왔는데 정말 무수한 일이 있었다.
탄손누트 공항을 내리자마자 온 몸을 덮쳤던 살인적인 더위, 사방에서 펑펑 터지는 폭탄 소리, 미군이 쏟아 부은 산더미 같은 맥주와 양주….
무엇보다 파월장병 위문공연을 통해 나는 본격적인 연예인으로서 이름을 날리게 됐다.
베트남에 가기 위해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 며칠간 기착했을 때의 일이다.
미군전용 뷔페식당에 여자 코미디언 오천평(吳千平)씨와 함께 갔는데, 이날 그녀가 본의 아니게 나를 유명하게 만든 것이다.
오씨는 큰 접시 두 개에 10인분 가량의 음식을 가득 담아 주위 미군들을 놀라게 했는데 결국 반 이상을 남기고 말았다.
순간 좌중은 썰렁해졌고 오씨 역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때 내가 가만히 있을 사람인가.
나는 곧바로 무대에 나섰고 즉석에서 ‘후라이보이’ 곽규석(郭圭錫) 선배의 팬터마임을 흉내냈다.
여자들이 샤워하는 모습을 그려 당시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던 곽선배의 주옥 같은 레퍼토리였다.
식당은 순식간에 쇼 무대로 변했다. 병사들의 환호에 기고만장해진 나는 연이어 각종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인솔 장교는 자기 모자를 벗어 모금에 나섰고 이 공연은 500달러를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뒀다.
술로 망신을 당한 일도 있다. 그때만 해도 조니 워커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비싼 양주였는데, 어느날 밴드 마스터가 미국사람에게 구해왔다며 조니 워커 3병을 싸 들고 왔다.
더욱이 장소는 에어컨까지 갖춰진 시원한 방.
맨 날 막소주나 퍼넣던 우리는 침을 질질 흘려가며 양주를 털어넣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것이 이틀 후 후방병원 침대 위에서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하다.
어쨌든 나는 두 차례 월남 공연을 통해 적지 않은 돈을 벌었고 무엇보다 웃기는 코미디언으로 알려져 귀국할 수 있었다.
갈 때는 3류 무용단과 밴드로 구성된 무명팀을 이끌었지만 돌아올 때는 ‘오천평과 정주일쇼’의 당당한 주인공이 돼 있었다.
특히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이름을 날린 후에는 인근 나이트 클럽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귀국 후 내가 당시 연예인 대부 노릇을 하던 최봉호(崔奉鎬)씨를 소개 받은 것은 월남 공연 때의 명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최씨를 통해 나는 당시 ‘물새 한 마리’ ‘잘했군 잘했어’로 최고의 스타 대접을 받고 있던 가수 하춘화(河春花)씨의 지방공연을 따라다니는 행운을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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