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서 공연 중 어머니 환영 보기도
이윤택 연출자와 오랜 작업 큰 행운"
같은 배우와 연출자가 15년간 한 무대를 만드는 일은 흔치 않다. 작품의 꾸준한 흥행은 물론이고 두 사람의 믿음과 신뢰가 지속돼야 가능한 일이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어머니’는 이 두 요소를 모두 갖춘 작품이다. 이윤택 연출과 배우 손숙(71)은 1999년 한국 어머니 상의 전형을 무대 위에 올렸다. 15년간 무대 위에서 관객을 웃기고 울렸던 손숙을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다.
“기적이죠. 하고 싶다고 해서 15년간 호흡을 맞출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가끔 ‘이윤택 연출 어머니와 제 어머니가 공연을 도와주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요.”
공연을 앞둔 손숙은 검붉은 원피스와 살구색 코트를 입고 분장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곧 머리를 쪽지고 하얀 한복을 입을 모습이 상상되지 만큼 세련된 차림새였다. 인간 손숙과 ‘어머니’ 속 배역이 언뜻 매치가 되지 않았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이지적인 역할을 주로 맡아 온 배우가 15년 전 어떻게 ‘촌사람’ 역을 맡았는지 궁금했다. 손숙은 “시골 출신이기 때문에 ‘어머니’ 속 역할이 오히려 진짜 내 모습”이라며 “내가 봐왔던 엄마, 할머니의 얘기라서 극에 흐르는 정서를 잘 안다”고 말했다.
몸에 맞는 옷을 입었다 해도 오랫동안 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가족과도 의견 충돌을 빚는데 일을 매개로 만난 연출자와 긴 시간 호흡을 맞추다 보면 마찰이 생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윤택-손숙 콤비는 이례적인 케이스에 속한다. 손숙은 “이윤택 연출이 ‘우당탕탕’하는 면이 있긴 하지만(웃음) 어른한테는 참 예의 바른 성격이라 마찰은 한번도 없었다”며 “배우가 실력 있는 연출자와 일하는 것은 큰 행운이라 오히려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에피소드도 많았다. 그는 공연 도중 돌아가신 어머니를 목격했다고 했다. “극 중 배경이자 제 고향인 밀양에 공연을 갔어요. 배우가 된 뒤 고향에 공연하러 간 건 처음이었는데, 1막 도중 객석 중간에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앉아 있는 어머니의 환영을 봤어요. 딸이 배우가 되겠다고 하자 ‘양반 집안에 딴따라가 웬 말이냐’며 결사 반대하셨던 분이거든요. 그랬던 분이 딸이 고향에서 공연한다고 하니 보러 오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1999년 러시아 타간타 극장 무대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어머니’는 서구 연극의 전형인 아리스토텔레스적 서사구조가 아닌 한국 특유의 음악극 형식을 띠기 때문에 러시아 관객이 극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손숙은 “공연이 끝나고 10분 넘게 기립박수를 받았다”며 “전쟁과 혁명을 겪었던 러시아 관객도 한국과 비슷한 어머니 상을 품고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70이 넘은 나이지만 그는 올해도 왕성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16일 ‘어머니’ 공연이 끝나면 연극 ‘3월의 눈’과 ‘키 큰 세 여자’로 다시 무대에 선다. KBS 드라마와 영화 ‘귀향’에도 출연한다. 그는 여전히 “관객을 만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현역 배우다.
“젊은 사람들이 ‘어머니’를 많이 보면 좋겠어요. 교과서나 어른들 입을 통해 과거를 듣기보다 예술 작품을 통해 다른 세대를 경험하면 정서적인 이해도가 더 높아지지 않을까요.”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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