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가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이긴 하지만, 어쨌든 도종환 의원이 장관 지명자가 된 것을 두고 젊은 연구자들이 시끌시끌한 것은 맞습니다.”
4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 본사 회의실에 모인 젊은 역사학자 기경량(39) 가천대 강사, 안정준(38) 경희대 연구교수, 김재원(31)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공동대표는 이렇게 역사학계 분위기를 전했다. 기 강사와 안 교수는 위대한 고대사를 주장하는 재야사학을 ‘유사 역사학’ ‘역사 파시즘’이라 규정하면서 비판한 ‘젊은 역사학자 모임’ 소속이다. 김 대표의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를 위해 뭉친 젊은 역사학자들 모임이다.
이들은 지난달 30일 문체부 장관으로 도 의원이 지명됐다는 뉴스가 나온 직후, 젊은 역사연구자들의 ‘단톡방’(단체 메신저 대화방)은 불이 났었다고 전했다. 도 의원은 지난 정권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가장 앞장서서 비판해 왔지만, 반대로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동북아역사지도 사업과 하버드 고대한국 프로젝트를 식민사학이라는 이유로 중단시키기도 했다. 젊은 학자들뿐 아니라 중견학자들도 기대와 우려가 갈린다. 계승범(서강대)ㆍ심재훈(단국대) 교수 같은 이들은 강한 우려를 숨기지 않는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교육부도 아닌 문체부 장관 지명을 역사학자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젊은 연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 봤다. 이들은 “정권에 대한 호불호, 여야라는 정치적 구분과는 전혀 다른 문제제기”라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도 후보자가 비판한 동북아역사지도 사업 무산
10년 진행한 하버드 고대한국프로젝트도 엎어져
해외 학계서 북한과 다를 게 없다는 얘기 들어”
“기존 학계 세뇌당했다고만 생각하니 답답
中 동북공정에 똑같이 맞대응하면 안돼
고대사 문제 반드시 학계 의견 수렴해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별대책위원회 시절의 도종환 의원이 문제라는 건가.
안정준(안)=“식민사학이라는 누명 때문에 50억원을 들였던 동북아역사지도 사업과 10년 정도 진행된 하버드 고대한국 프로젝트가 무산됐다. 그걸 도 의원은 자기 업적이라 말하면서도 ‘유사 역사학’에 경도되지 않은 것처럼 대답한다.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기경량(기)=“역사학계가 다 좌파라서 교과서를 국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권 교체로 폐기됐다. 남은 건 식민사학자들이 역사학계를 장악했다는 터무니없는 모함이다. 도 의원이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으면 한다. 역사학계와 허심탄회하게 대화했으면 좋겠다.”
김재원(김)=“광활한 영토를 지닌 위대한 고대사가 들어간다면 일시적으로라도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유사역사학 쪽 주장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운동을 주도한 도 의원은 이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도 의원은 국정화 반대 운동하면서 학계와 친밀하지 않은가.
안=“반대 운동할 때 함께 했던 중견 학자들이 많은 얘기를 전달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유사역사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하고 있는 게 없다.”
기=“선입견 문제가 아닐까. 많은 이들이 강단사학계가 식민사학에 찌든 기득권이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김=“위대한 고대사에 대한 희망 때문에 사학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공부해 나가다 보면 그게 왜 틀렸는 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런데 그걸 기존 학계는 세뇌 당했다고만 생각하니 답답하다.”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은 지도의 완성도에 문제가 있다는 반론이 있다.
안=“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유사역사학이 외부에서 먼저 이 사업을 흔들었다. 지도의 완성도는 그 뒤에 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지도 사업에서 논란이 됐던 낙랑군 위치 문제는 어떻게 보나.
안=“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김=“100년 전이라 하니까 자꾸 ‘친일 사학’ 소리 듣는다. 하하.”
기=“그러면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다라고 하자.”
-하버드 고대한국 프로젝트 지원 중단 문제는 어떤가?
안=“우리 고대사를 해외에 전면적으로 소개하는 사업이 그렇게 중단된 건 국가적 망신이다.”
기=“남한 학계는 중국이나 북한하고 다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똑같네, 라는 핀잔을 해외 학계에서 듣는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재야사학의 문제는 뭔가.
김=“오직 영토 문제에만 집착한다. 그 안에 살았던 사람에 대한 얘기는 없다. 오직 광활한 영토, 그것뿐이다.”
기=“딱 일제 황국사관이다. 일제 황국사관에서 일본을 주어 자리에서 빼고 그 자리에 한국을 집어넣고는 식민사학을 청산했다고 주장한다.”
김=“한반도에 갇히지 않은 우리 역사라는 주장은, 황국사관이 일본 역사를 섬에 가두지 않으려는 것과 똑같다.”
안=“역사상 개인 등 다양한 주체들을 국가와 민족에 매몰시키고, ‘드넓은 우리 영토’만 얘기하는 게 무슨 역사학인가.”
-‘동북공정 대응’을 논리로 내세우고 있다.
안=“사회주의 국가라 당국 입장이 그렇다는 것이지 중국 학계엔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 그리고 동북공정과 똑같은 논리로 우리가 대응한다는 건 역사학의 퇴보일 뿐이다.”
기=“우리와 중국 빼고 제3국의 학자들을 설득하려면 제대로 된 연구를 해야 한다. 맞대응한다고 왜곡에 동참하면 ‘똑 같은 것들’이란 얘기만 듣는다.”
-정권 교체 직후 과감히 나선 이유는.
기=“스스로 ‘진보’임을 자임하는 분들께 꼭 이 말씀 드리고 싶다. 유사역사학이 얘기하는 위대한 상고사는 그 내용을 보면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 역사학자들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봐 달라.”
안=“난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다. 젊은 역사학자들 대개 다 그럴 거다. 그런데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정치인들까지 그런데 경도된 걸 보면 기가 찰 따름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때 반대논리 중 하나가 ‘학계 의견 수렴’이었다. 고대사 관련 문제도 반드시 학계 의견을 수렴해줬으면 좋겠다.”
김=“국정화 반대 운동 벌였던 제 입장에서 도 의원은 고마운 분이다. 20~30년 동안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이 왜 걱정하는 지를 진지하게 한번 들어줬으면 좋겠다. 이건 엘리트주의, 전문가주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일이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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