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등록 : 2017.07.11 14:55
수정 : 2017.07.11 14:56

[이정모 칼럼] 이장윤과 동백

등록 : 2017.07.11 14:55
수정 : 2017.07.11 14:56

1995년 11월 3일 금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지도교수님이 나를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학생이 찾아오는 것을 귀찮아할 정도로 바쁜 사람이었고 나는 아직 이렇다 할 실험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가 나를 급히 찾을 이유가 없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교수실로 갔다. 항상 독일인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정이던 교수님의 낯빛 역시 좋지 않았다.

“매우 유감이네.” 그의 첫마디였다. ‘아, 내가 몹시 마음에 안 드시나 보다. 또 무슨 꾸지람을 하실까?’ 그는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원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멍하니 있자 그가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자네, 아직도 모르는가 보군. 한국인 음악가 이장윤이 죽었다네. 정말 유감이지. 우린 거장을 잃었어.”

나는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장윤이라는 음악가가 누구길래 독일인 교수가 저렇게 가슴 아파한단 말인가. 나는 교수님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저는 이장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교수의 표정이 바뀌었다. ‘뭐, 이장윤을 모른다고! 이런 무식한 놈 같으니라고…’

그날 저녁 뉴스에 한국인 음악가 이장윤(Isang Yun)의 부고가 나왔다. 교수님이 말한 이장윤은 윤이상이었던 것이다. 독일이니 당연히 성을 이름 뒤에 말한 것인데 이름이 흔한 성씨인 ‘이’로 시작해서 차마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또 독일어에서 모음 앞에 있는 ‘s’는 ‘ㅅ’ 대신 ‘ㅈ’ 발음이니 이장윤이라는 소리를 듣고 윤이상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나는 윤이상이라는 이름만 알았을 뿐 그의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아마 한국에서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1999년 북한 악단 ‘평양 윤이상 앙상블’이 독일 순회공연을 하면서 내가 살던 본에도 왔다. 공연장의 이름은 ‘브로트 파브리크(Brot Fabrik)’. 예전에 빵 공장이었던 곳을 고쳐서 만든 작은 음악당이었다. 입장권은 유학생에게 지나치게 비싼 가격이었지만 나도 이장윤을 안다고 과시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갔다(정작 교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앙상블은 네 명으로 구성된 현악합주단이었다. 그들은 윤이상의 실내악 작품만 연주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윤이상의 음악을 들었다. 제법 긴 연주회 동안 나는 끝까지 집중력을 놓치지 않았다. 클래식 음악에 어떤 감수성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나를 힘들게 했던 이장윤의 음악이고 또 연주하는 사람들이 북한 음악가였다는 사실에 살짝 흥분했기 때문이다.

끝 곡이었다. 연주자들은 마지막 활을 그은 다음에 마치 그 음을 쫓아가는 것 같은 표정으로 허공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물론 더 이상 고막을 진동시키는 음은 없었다. 하지만 작은 음악당은 시선으로 가득했다. 관객들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얼굴을 돌려 관객석 뒷면을 쳐다볼 정도였다. 한참 후에야 그들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 이제야 윤이상이 지휘봉을 내렸구나’ 하고 말이다.

내가 독일에 있을 때만 해도 주독일 한국대사관은 내가 살던 본에 있었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대사관 직원들을 위한 자잘한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어느 날 대사관 직원이 말했다. “이 방이 동백림 사건 당사자들이 고문을 받은 방이야.”

윤이상은 1963년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에 이런저런 인연으로 북한을 방문했던지 방문과 연이 닿은 유학생들이 제법 있었다. 1967년 중앙정보부는 유학생들을 잡아서 서울로 송환했는데 그 전에 잠시 주독 대사관에 학생들을 가뒀다는 게 대사관 직원의 전언이었다. 실제로 그 방에서 고문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에 유학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윤이상은 1969년 석방된 후 죽을 때까지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여기까지가 윤이상과 관련된 내 이야기의 전부다. 한국에 귀국한 후에도 윤이상의 음악을 라디오나 음악당에서 들어본 적이 없고 심지어 그의 고향인 통영에 몇 차례 갔지만 기념관은커녕 윤이상을 기리는 어떠한 표시도 찾지 못했다. 지난 정부가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에 대한 예산 지원을 2016년부터 끊었으며 주최자인 경상남도 역시 2017년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전부다. 헐~ 올해는 윤이상 탄생 100주년인데 말이다. 윤이상과 관련된 단체들이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지난 7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는 윤이상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통영에서 가져간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윤이상 선생이 생전 일본에서 배를 타고 통영 앞바다까지 오셨는데 정작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울었다. 그 분의 마음이 어땠을까, 무엇을 생각했을까 하면서 저도 통영에 가면 동백나무 꽃이 참 좋았는데, 그래서 조국 독립과 민주화를 염원하던 선생을 위해 고향의 동백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가져오게 됐다.” 아름다운 말이다. 그나저나 교수님은 요즘도 이장윤의 음악을 좋아하시는지.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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