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등록 : 2018.03.12 04:40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최장집 “한국 민주주의 살리는 길은 정당정치 정상화”

<3>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등록 : 2018.03.12 04:40

#‘민주주의’ 최고의 이론가

“민주주의 중심 메커니즘은 정당”

2002년 발표한 대표 저작에서

참여민주주의 과소 평가 지적

한국 현주소 진단하며 해법 제시

#DJ정부 때 민주적 시장경제론

97년 외환위기ㆍ2008년 금융위기

양극화 심화되며 적지 않은 공감

서구정치 최근 포퓰리즘 부상 속

“민주주의 갈 길은” 또다른 과제로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의 최고 이론가로 꼽히는 최장집은 정당정치의 정상화를 강력히 주장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현대 사회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함께 모더니티를 이루는 양대 제도다.전후 서구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인 철학자 존 롤스, 정치학자 로버트 달, 사회이론가 미셸 푸코와 위르겐 하버마스는 현대 민주주의 사상의 발전에 직ㆍ간접적으로 기여해 왔다. 지난 100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주목할 민주주의 사상가는 정치학자 최장집(1943~ )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최장집의 일관된 연구 테마였을 뿐만 아니라 민주정치의 제도화는 그의 열렬한 희망이었다. 민주주의(democracy)란 인민(demos)의 지배(kratia)를 말한다. 그렇다면 민주정치란 무엇인가?

최장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주정치란 정당을 중심적 매커니즘으로 하여 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폭넓게 표출하고 대표하는 방법을 통해 다수의 힘을 동원하고,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정책적 대안을 실현하고, 그 실현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지지를 동원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적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 규정에는 최장집의 민주주의 이론이 집약돼 있다.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성숙시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정치와 정당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 기원을 둔 민주주의는 우리 인류의 ‘오래된 미래’다. 인민의 지배, 다시 말해 시민들의 자기 지배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가치는 없다. 최장집은 이 오래된 미래를 깊이 있게, 열정적으로 탐구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의 성찰적 계몽을 이끌어 왔다. 학문적 연구와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두 기준을 놓고 볼 때 그는 민주화 시대 최고의 이론가다.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40년에 가까운 지적 활동에서 최장집은 주목할 저작과 담론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지식사회를 넘어 시민사회에 그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린 담론은 1998년 김대중정부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아 발표한 ‘민주적 시장경제론’이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국가-시장-시민사회 간의 생산적 균형을 요청한 중도진보 대안론이다.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도적 측면에서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만큼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진보는 물론 보수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최장집 사상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2002년에 발표된 이 책은 200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부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다. 2012년 미국 스탠퍼드대학 아시아태평양 연구센터는 이 책의 영어판 ‘Democracy after Democratization: The Korean Experience’를 출간했다.

2002년 처음 발간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우리의 민주화를 '보수적 민주화'라 부르면서 그 원인과 실태, 해법에 대해 논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영문판. 한국 민주주의를 해외에 널리 알렸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네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2002년의 시점에서 최장집은 한국 민주주의가 안락한 보수주의에 빠져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런 보수적 민주화의 역사적·구조적 기원을 추적하며, 민주화 시대에 관찰할 수 있는 국가의 무능, 시장으로의 전환, 시민사회의 명암을 분석한 다음 결론으로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과제를 탐색한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성취한 이론적·실천적 기여는 세 가지다. 첫째, 한국 민주화를 냉전분단국가 형성과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 속에 위치시켜 조명한다. 둘째, 허약한 대표성, 정당체제의 미성숙, 지역주의 정치를 한국 정치의 현주소로 진단한다. 셋째, 시민사회 균열을 제대로 반영한 정당정치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경제적 민주화를 한국 민주주의의 당면 과제로 제시한다.

최장집 민주주의론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정당정치의 정상화에 대한 그의 이론적·실천적 관심이 체계적으로 탐구되고 오롯이 반영된 저작이 바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다. 현대 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국민 다수의 의사를 정치적으로 대의하고 대표하는 정당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는 민주정부를 강하고 능력 있게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가 민주주의적 정치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야 하며, 그 중심적 매커니즘이 정당정치이므로 정당과 정당체제를 바로 세우고 튼튼한 사회적 기반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는 최장집의 주장은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가야 할 길을 선명히 안내한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향하여

돌아보면 민주주의는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사회변동을 이끌어온 강력한 힘의 원천이자 최고의 규범적 이상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언명은 임시정부에서 현재까지 우리나라를 규정해온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문화적 정체성이다. 국민주권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고 6월항쟁을 통해 민주화 시대를 열었다.

민주화 시대에서 핵심적 문제는 ‘어떤 민주주의’를 이룰 것인가에 있었다. 이 엄정한 질문에 최장집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선 경제적 민주화를 위한 실질적 민주주의를 한국 민주주의의 목표로 내세웠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의 확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불평등의 강화를 주목할 때 최장집의 대안은 작지 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2012년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가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것은 구체적인 증거였다.

이후 최장집은 ‘진보적 자유주의’를 주창해 다시 한 번 관심을 모았다. 그는 자율적 결사체의 강화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국가·시장의 관료화에 맞서는 정당과 이들 간의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자유주의’를 강조했다. 이러한 자유주의가 사회·경제적 평등을 모색하는 진보적 방향성을 갖는 것이 ‘진보적’ 자유주의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의 21세기 버전이라 할 만하다.

그 동안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에 대한 반론이 없지 않았다. 대표적인 반론은 최장집이 참여민주주의를 과소평가한다는 비판이다. 지난 30여 년 우리사회 민주화를 이끌어온 주요 동력은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이었다.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는 한국 민주화 과정을 특징짓는 현상이었다. 2017년 박근혜 정부를 퇴진시킨 것도 다름 아닌 촛불시민혁명이었다. 요컨대, 정당정치와 운동정치,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를 생산적으로 결합해야 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에 부여된 새로운 과제라 할 수 있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미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선 정치를 활성화하고, 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정당정치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게 최장집 민주주의론의 요체다. 주목할 것은 21세기 현재 어느 나라든 정당정치가 위기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위기의 일차적 원인은 정당이 가져야 할 ‘대표성의 위기’다. 대표성의 위기란 기성 정당이 국민 다수의 정치적·경제적 가치 및 이익을 더 이상 대변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대표성의 위기가 가져온 결과가 포퓰리즘의 부상이다. 오늘날 포퓰리즘은 두 얼굴을 가진다. 정책적 측면에서 포퓰리즘이 ‘대중영합주의’로 나타난다면, 정치적 측면에서는 ‘인민주권주의’로 표출된다. ‘정치적 포퓰리즘’은 무엇보다 ‘엘리트 대 국민’이라는 균열을 부각시킨다. 정치의 일차적 목표가 엘리트 기득권에 맞선 인민주권의 회복에 있다는 게 ‘정치적 포퓰리즘’의 핵심을 이룬다.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연합뉴스

이러한 포퓰리즘이 최근 서구 정치를 뒤흔들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샌더스 현상’, 프랑스의 ‘국민전선’과 ‘전진하는 공화국’,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 영국의 ‘독립당’,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에 이르기까지 우파 포퓰리즘은 물론 좌파 포퓰리즘이 번성하고 있다. 포퓰리즘 정치는 기성 정당과 공론장을 건너뛰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국민과의 직거래를 시도하려는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한다.

포퓰리즘은 제도정치를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불편한 친구다. 그러나 동시에 인민주권의 회복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한 식솔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포퓰리즘이 부상한 것은 서구 정치가 새로운 시대로 나가는 문턱에 올라서 있음을 일러준다. 우리사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불평등 완화를 포함한 문제 해결에 무력한 기성 정치사회에 대한 실망은 언제든지 포퓰리즘을 불러낼 수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민주화 이후의 포퓰리즘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봐야 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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