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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생명을 나르는 수레

입력
2017.08.0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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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산은 짙푸른 녹음이 뿜어내는 기운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치악산이 그랬다. 아내와 함께 산길로 들어서자 꽃 향기가 진동을 했다. 꽃 향기는 풀과 나무에서만 아니라 바위나 돌, 계류의 물소리에서도 풍기는 듯싶었다.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니 작은 암자가 나타났다. 우리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차서 더 오르기를 포기하고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암자 뒤쪽으로 가니 마침 작은 평상이 눈에 띄어 털썩 주저앉았다. 평상 옆으로는 제법 큰 돌확 하나가 땅에 묻혀 있었다. 돌확 속에는 나뭇잎이나 지푸라기 같은 것들이 둥둥 떠 있었다. 아내는 돌확 속을 들여다보다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놀란 눈빛으로 말했다. “여보, 돌확 속에 사슴벌레가 있는데, 다리가 뭔가에 걸려 나오지도 못하고 버둥거리네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슴벌레의 다리에 걸린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도롱뇽 알이네. 알 껍질에 다리가 걸려서 못 나오는군.”

사슴벌레도 그렇지만 도롱뇽 알을 본 것도 무척 오랜만이었다. 도롱뇽은 청정한 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희귀한 양서류. 아내는 손을 뻗어 돌확 속의 사슴벌레를 도롱뇽 알에서 떼어 풀어주며 갑자기 이렇게 중얼거렸다. “얘야, 나중에 혹여 내 자식들이 너처럼 길을 잃고 방황할 때 네가 좀 도와다우!” 그러고 나서 도롱뇽 알들도 비가 안 오면 말라 죽을 거라며 물을 두어 바가지 떠다가 돌확에 부어주면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얘들아, 나중에 혹여 내 자식들이 너처럼 길을 잃고 방황할 때 네가 좀 도와다우!”

전혀 예기치 못한 아내의 말을 듣고 나니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가 이제는 단순한 여자가 아니라 진짜 만물의 어미가 되어가는구나! 진심이었다. 아내는 이제 제 자식만 아니라 만물의 생명을 싣고 가는 수레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찌 아내뿐일까. 세상의 모든 어미들은 모두 이런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이처럼 생명을 극진히 보듬고 살아가는 세상의 어미들 때문에 여전히 세상이 망하지 않고 멀쩡한 것이 아닐까.

그날 산길을 내려오며 궁금해서 아내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이 툭 튀어 나왔느냐고. “갑자기 튀어나온 건 아니에요. 아마도 여자와 남자의 차이일 텐데, 생명을 자기 몸으로 낳아본 어미들은 세상의 모든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몸으로 알아요.”

나는 문득 인도의 자이나교 신자들이 생각났다. 인도여행을 자주하는 편인데, 갈 때마다 헝겊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나체족들을 보곤 했다. 그 나체족들이 바로 자이나교 신자들이다. 물론 신자들 가운데는 흰 옷을 걸치고 사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고 다니는 건 옷감이 식물을 해쳐 만들어졌기에 불살생(不殺生)의 신조에 어긋나기 때문이고, 심지어 그들이 몸에 난 터럭조차 다 뽑아버리는 것은 터럭 속에 사는 이나 벼룩 같은 벌레들을 해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격하게 보일 정도로 철저하게 생태적 삶을 살아온 그들은 이미 2,000년 전에 지구 위에 서식하는, 무려 사십만이나 되는 생물 종의 목록을 만든 바 있다. 그들에겐 지구 위의 모든 생명이 신성하다. 생태적 위기가 한껏 고조되는 때, 종교의 차이를 떠나 생명의 수레를 자처하며 살아온 자이나교의 생태적 지혜와 유산은 인류가 소중하게 보듬고 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하산하다가 그늘이 있는 계곡의 그늘에 들어가 준비해 온 도시락을 꺼냈다. 배가 몹시 출출했지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먼저 밥 한 숟갈씩을 떠내 계곡 물 속으로 던지며 ‘고수레!’를 외쳤다. 어릴 때 소풍이라도 가면 늘 하던 짓이었다. 맑은 물속에서 헤엄치며 놀던 물고기들이 우리가 던진 밥을 향해 반갑게 달려들었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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