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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속의 여론] 갑질 당해본 사람 57%는 또 다른 ‘갑’ 됐다

입력
2018.09.08 04:4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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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제주대학교 아라캠퍼스에서 제주대 멀티미디어디자인전공 4학년 비상대책위원회 학생 등이 '갑질' 문제가 제기된 교수 파면 등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3일 오후 제주대학교 아라캠퍼스에서 제주대 멀티미디어디자인전공 4학년 비상대책위원회 학생 등이 '갑질' 문제가 제기된 교수 파면 등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갑질은 불평등한 계약관계를 의미하던 갑을관계에서 우월한 지위를 갖는 ‘갑’이 ‘을’에 자의적 권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비난하는 신조어다. 2013년부터 주로 대기업 오너가의 일탈적 횡포를 보여주는 사건을 통해 간간히 인터넷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5년여가 지난 지금은 오히려 일상 생활 속까지 갑질 행태가 번져가는 양상이다. 이번 호는 불평등과 민주주의 연구센터(CSID 소장: 권혁용 고려대 정외과 교수)와 한국리서치가 8월에 전국성인남여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웹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국사회 갑질 문화의 실태와 문제점을 진단한다.

한국사회 갑질 심각성. 그래픽=강준구 기자
한국사회 갑질 심각성. 그래픽=강준구 기자

 ◇열에 아홉은 “1~2번 이상 당해봤다” 

우리나라의 갑질 문화에 대해 전체 응답자의 50%가 “매우 심각하다”고 답했고, 46%가 “대체로 심각하다”고 답했다. 한편 갑질 상황을 당해본 경험이 있는 지 물어본 결과 “매우 자주 당하고 있다”는 응답은 6%, “가끔 당하고 있다”는 응답이 46%, “한두 번 당해본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38%였다. “전혀 경험한 바 없다”는 응답은 10%에 그쳤다. 한국인의 열이면 열이 한국사회 갑질문화의 심각성에 동감하고 있으며, 최소한 열에 아홉은 한 번이상 갑질의 경험을 갖고 있는 셈이다.

 ◇남성, 젊은 세대가 더 자주 당해 

그렇다면 갑질 행태에 더 빈번히 노출되고 있는 취약집단은 누구인가? 한두 번 갑질 경험을 한 사람들까지 갑질 취약집단으로 보기는 어려워 “매우 자주 당했다”거나 최소한 “가끔 당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을 ‘갑질 취약집단’으로 분류해보았다. 남성(58%)이 여성(46%)보다, 2030세대(59~62%)가 4050세대(50~55%)나 60대 이상(38%)에 비해 취약집단 비율이 높다. 직업별로 보면 학생(62%)과 생산/기능/노무직(62%), 자영업 종사자(60%)들이 최대 갑질 취약집단이며, 판매/영업/서비스직과 화이트칼라층에서는 57%로 뒤를 이었고, 무직/퇴직/기타 종사자(46%)나 주부층(32%)이 갑질 피해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권력기관별 갑질 심각성. 그래픽=강준구 기자
권력기관별 갑질 심각성. 그래픽=강준구 기자

 ◇권력형 갑질 더해 생활형 갑질도 심각 

갑질 논란은 힘을 가진 권력집단의 갑질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번 조사 결과를 보면 정치권(94%), 대기업(93%), 사법부(90%), 언론(85%) 등을 심각한 갑질집단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익단체(81%), 정부/공무원(75%), 노동조합(74%)도 갑질집단이라는 눈총을 강하게 받고 있으며, 중소기업(63%)이나 소비자(57%)들도 비난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과반이상이 갑질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생활 속에서의 계약관계에 의한 갑질도 심각하다. 본사-대리점(93%), 고용주-직원(93%), 고용주-인턴/견습생(87%) 등 기업활동과 고용 관련 갑질도 심각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주목할 점은 최근 몇 년 동안 문제가 되어 온 감정노동자와 소비자 관계(85%), 비정규직과 정규직 관계(84%), 임대-임차관계(75%), 직장 상사-후배직원 사이(74%) 등 일상 생활 속에서의 생활형 갑질 역시 심각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라는 사실이다. 갑질에 대한 공포가 생활 저변까지 확산되었음을 시사한다.

갑질 피해 사례. 그래픽=강준구 기자
갑질 피해 사례. 그래픽=강준구 기자

 ◇인격모독ㆍ폭언이 최다… 삶의 만족도 하락 

갑질 횡포는 단순한 불평등 계약에 따른 경제적 손해로 그치지 않는다. 응답자들이 생활에서 당한 갑질의 사례(중복응답 결과)를 정리해보면 ‘인격모독/폭언’이 60%로 가장 높고, ‘사생활 침해’(27%), ‘따돌림과 차별’(20%) 같은 인격침해가 ‘계약불이행/변경’(41%)이나 ‘해고 등 인사불이익’(20%) 같이 경제적 불이익을 주는 갑질보다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 갑질은 결국 상대적 우위에 서 있는 갑의 부당한 모욕이나 요구에 굴복할 것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에 순응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삶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되기 쉽다. 이번 조사 결과를 보면 실제로 갑질 피해에 자주 노출되는 사람일수록 자기 삶에 대한 만족도는 급격하게 떨어진다. 갑질 피해를 경험하지 못한 집단 중 자기 삶에 만족한다는 응답은 61%, 한두 번 경험하는 데 그친 집단에서는 53%로 과반을 넘지만, 갑질 취약집단에서는 30%대에 불과하다.

 ◇갑질이 갑질을 낳는다? 

주목할 점은 또한 갑질을 당한 빈도가 많은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갑질한 경험이 높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갑질의 피해를 ‘자주’ 혹은 ‘가끔’ 받은 경험이 있는 층에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한번 이상 갑질한 경험이 있는 비율이 56~57%대에 달한다(매우 자주+가끔+한 두 번). 갑질 피해의 경험이 ‘한 두 번’에 그친 집단에서는 44%(매우 자주 0%+가끔 9%+한두 번 35%)로 떨어지고, 갑질을 당해 본 경험이 없는 집단에서는 19%(매우 자주 0%+가끔 3%+한두 번 16%)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갑질 피해자들이 부당한 갑질에 굴복하고 적응하게 될 경우, 손상된 자존감을 보상받기 위해 자신보다 취약한 또 다른 ‘을’에게 되갚아주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갑질 피해빈도별 가해빈도. 그래픽=강준구 기자
갑질 피해빈도별 가해빈도. 그래픽=강준구 기자

 ◇공적 해결 안 되니 집단행동-SNS 폭로 

갑질 사건이 발생할 때 언론과 인터넷은 들끓고 정부나 사법부도 엄단의 의지를 표명하지만, 해결 전망은 불투명하다. 다수 여론은 한국사회에 갑질을 억제하고 해결할 사회규범이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믿지 않는다. 갑질이 발생했을 때 ‘당사자에게 정당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소용이 있을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응답은 32%,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응답이 67%다. 도움을 청하거나 해결을 요청할 제도가 작동하는가? 당장 해당 기관의 담당부서에 도움을 요청(44%), 사법 조치(46%), 공공기관 상담이나 청원(49%) 등 공적인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될 것이라는 의견은 과반에 미치지 못한다. 결국 ‘피해자 규합한 집단행동’(56%)이나 ‘SNS-언론에 폭로’(63%)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피해자들이 믿을 곳은 제도 밖이다. 우려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지만, 갑질의 공포가 줄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한울(한국리서치 여론분석전문위원)

조계원(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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