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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어느 철학 광대의 소극(笑劇)

입력
2017.03.2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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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수요일엔 좀 씁쓸한 일이 있었다. 한국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씨가 광화문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다. 철학, 역사학, 사회과학 등을 전공으로 공부했던 필자에게 한씨의 관점은 신선한 면이 많았다. 그를 유명하게 한 <피로사회>는 오늘날 성공적인 듯 보이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성과주체’가 되어 고통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투명사회’에서는 SNS와 빅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걱정해야 할 문제가 빅 브라더 같은 ‘판옵티콘’(Panopticon)의 감시체계라기보단 자기 포장의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들의 리얼리티 쇼와도 같은 시놉티콘(Synopticon)이라고 이야기한다. ‘에로스의 종말’, ‘아름다움의 구원’에서는 타자성을 체험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획일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꾸밈의 경험 속에 갇혀 보다 아름다운 인간성을 체현하고 성장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텍스트는 본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지만, 그의 관점은 울림의 공감대를 갖는 것 같다. 보다 엄밀하게 읽는다면 사회학자 미셸 푸코의 권력 개념을 주로 구속력으로만 단순화하고 내가 다루는 빅데이터의 다차원적인 맥락적 재현(contextual representation)을 무시한 채 변인(變因)의 피상적 ‘상관관계’만 있다고 단정하는 등, 자신의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 오독ㆍ폄훼한 경우도 있지만 철학 에세이로서는 일단 눈감아 줄 만하다. 나는 개념과 사유체계의 엄밀함을 따지기보다 그의 문제의식의 참신성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또 그런 문제의식이 글로벌한 보편성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궁금했다.

한국 독자들과 만난 그날, 그런 질문을 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약속시간보다 한참 늦게 도착한 그가 대뜸 연단에 있던 피아노에 앉더니, 짧게 바흐를 연주하다 말고 짜증과 신경질적 말을 계속 쏟아냈기 때문이다. “소리가 막혔어. 이게 피아노가…야마하야?” 그러면서 본인이 독일에서 몇 천 유로를 주고 산 독일제 피아노는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었지만 소리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했다. 4,000유로를 한화 30만원 등으로 한참 잘못 이야기하자 한 청중이 “500만원쯤인데요”라고 바로잡아 줬더니 대뜸 “에이~ 댁이 뭘 안다고 그러슈. 관둬요”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러곤 자신이 관심이 있다는 책을 꺼내서는 일절 설명도 없이 독일어로 한참 계속 읽어 내려갔다.

이어지는 독단적이고 이상한 모습에 청중들이 나가기 시작했고 본인은 그 뒤로 계속 피아노 연주만 했다. “이건 예의가 아니지 않냐?”고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그럼 그냥 가세요”라고 응수하더니, 본인의 책을 번역해 주고 초청한 출판사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은 하나도 번역을 안하고 별로 가치 없는 책들만 번역한다고 불평했다. 주제의식도, 이야기의 컨셉도 없이 한국 정치판에 대한 횡설수설을 잠시 이어가다가 그는 다시 또 피아노를 쳤고, 주최측이 그만 끝내달라고 하자 갑자기 “안녕히 가세요” 하더니 순식간에 엘리베이터로 사라져, 생각지 못했던 부조리극은 막을 내렸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예술가들 중에는 괴팍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의 ‘광대극’이 불쾌하기만 했던 이유는, 그의 언행에는 넥타이를 자르던 백남준이나 존 케이지의 4분33초 퍼포먼스 같은 컨셉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저 ‘아픈 사람’의 불만과 오만, 불안한 자의식의 민낯만이 비쳐졌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그런 모습은 내게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저자와 저작물을 분리해서 봐야 하나, ‘지행합일’의 진실성을 중요시해야 하나? 육체의 철학을 설파한 니체도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하고 미쳐 죽었다지만, 앞으론 좀 더 건강하고 진실된 철학자들을 만났으면 싶다. 여전히 철학적 사유가 인간의 삶과 문화에 중요함을 믿기 때문에.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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