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이나 기업, 사회단체부터 사적인 작은 모임까지 조직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숙제다. 수직적 위계나 기계적인 다수결이 아니라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수평적 협력과 다양성에 바탕을 두고 충분한 토론을 거쳐 합리적인 의사 결정에 이르기란 쉽지 않다. 뉴질랜드의 젊은 개발자들이 만든 루미오(Loomio)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온라인 플랫폼이다.
루미오의 공동설립자인 리처드 바틀렛은 “민주주의는 갈등을 전제로 하지만 저마다 다른 관점과 경험이 생산적 방식으로 모일 때 더 나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며 “차이는 갈등이 아니라 자원”이라고 강조했다.
루미오는 2011년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돼 전세계를 휩쓴 점령시위에서 나왔다.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열린 점령시위에 참여했던 청년들이 집단적 논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발언권 쏠림, 비효율성, 상명하달식 결정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회의 도구를 고민하다 만들었다. 두 차례 크라우드 펀딩으로 2014년 정식 버전을 내놓았다.
찬성, 반대, 보류, 차단의 네 가지 선택으로 단순하게 구성된 소프트웨어이지만, 투표할 때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작성하는 코멘트 난과 재투표 기능을 갖추고 있어 상호 토론과 조율을 통해 현명한 결론에 이르도록 설계돼 있다. 시민주도형 정치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스페인의 신생 정당 포데모스는 루미오를 활용해 2만7,000여 명의 시민이 토론과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고, 뉴질랜드의 웰링턴 시의회도 의안 토론과 표결에 루미오를 쓰고 있다. 2011년 이후 브라질의 시민운동과 헝가리 학생운동, 하버드대학과 위키피디아재단도 루미오를 사용했다.
그는 8~10일 열린 2016 서울시 청년허브 컨퍼런스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사회혁신과 청년정치를 집중적으로 다룬 이번 행사의 여러 세션 중 10일 이슈포럼 ‘일상의 민주주의’ 연사로 토론을 이끌었다.
마침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다음 날이라 한국 정치와 촛불시위가 자연스럽게 화제가 됐다. “작년 겨울 한국에 왔을 때는 경찰 물대포에 사망한 백남기 농민 건을 보면서 한국에서 시위는 아주 위험하구나 생각했는데, 이번 촛불시위는 완전히 축제더라”며 놀라워했다.
“금요일의 탄핵 가결은 역사적 순간이고 한국인은 멋진 일을 해냈어요. 하지만 월요일이 되면 여러분은 다시 상사, 교수, 남편, 아버지 등과의 관계에서 비민주적인 상황을 만나게 될 겁니다. 탄핵을 이끈 에너지가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힘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대통령이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걱정하는 것은 그보다 더 깊은 사회적 부분이죠. 대통령이 가도 현상태는 계속될 수 있으니까요. 저에게 대통령이나 의회는 추상적이고 부차적입니다. 그보다는 나를 둘러싼 환경으로서 가족이나 동료 등과의 민주적 소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루미오는 누구나 설계도를 볼 수 있게 공개한 오픈소스여서 필요에 맞게 수정할 수도 있다. 그는 “파생 버전이 몇 개나 있는지 파악은 못했지만, 아이슬란드 해적당은 구글독스 같은 협업도구에 루미오를 결합한 프라마 복스(Frama Vox)를 의사 결정의 주요 도구로 쓰고 있다”고 소개했다.
‘더 나은 의사결정 도구를 제공한다’는 루미오의 목표는 루미오 팀의 일하는 방식에도 구현되고 있다. 루미오는 1인1주 협동조합이고 사장이나 대표 같은 직위가 없다. 뉴질랜드 사회적 기업들의 열린 네트워크인 엔스파이럴의 멤버이기도 하다. 루미오와 엔스파이럴은 위계가 없는 민주적 조직을 만드는 실험을 하면서 모든 결정을 루미오로 하고 있다.
루미오는 현재 한국어를 포함해 50개 언어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번역 작업은 전부 자원봉사로 이뤄졌다. 그는 “한국에는 아직 낯선 루미오를 알리고 쉽게 쓸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오미환 선임기자 mihwan9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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