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다행으로 나는 야구 특기생으로 성동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이미 공부와 담을 쌓은 나는 학업성적만으로는 성동고 문턱도 도저히 밟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야구로 명문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으니 ‘야구가 정말 좋기는 좋구나’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고등학교 진학까지는 좋았지만 이후가 더 큰 문제였다. 성동고 야구 실력은 당시만 해도 바닥을 헤맬 정도였다. 그렇다고 다른 학교처럼 수업은 뒷전으로 한 채 야구에만 몰두하는 것도 아니었다. 수업은 수업대로 다 하고 방과 이후에 시간을 쪼개 야구를 했다. 그러다 보니 야구부의 실력은 좀처럼 늘지 못했다. 많은 학생들은 야구부를 이도 저도 아닌 계륵으로 여겼다.
처음에는 그런 분위기에 나도 주눅이 들었다. 수업시간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방과 후면 잽싸게 운동장에 나가 야구를 했다. 그렇게 나는 1학년을 보냈다.
하지만 2학년이 되면서 내 안의 악동 기질이 발동했다. 그간 잠잠하던 주먹이 서서히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부 좀 한답시고 야구부를 무시하는 친구들이 첫 번째 ‘대상’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친구들을 학교 건물 뒤편으로 데려가 혼을 내주곤 했다. 한동안 그러고 나니 야구부원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친구들이 사라졌다.
수업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눈을 뜨고 잠을 자는 기술을 익히는 것뿐이었다. 검은 것은 칠판이요, 흰 것은 글씨라는 것밖에 몰랐던 나에게는 수업이 고문보다 힘들 수밖에 없었다.
가끔가다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어이, 거기 졸고 있는 애. 나와서 이 문제 풀어봐.” 내가 야구부원인 것을 알면서도 일부 선생님들은 무지하게 어려운 문제를 풀라고 하셨다. 물론 나는 꿀밤을 맞는 것으로 문제풀이를 대신했다.
무료하던 학교생활에 새로운 활력소가 된 것은 교내 서클 ‘헤라클레스’였다. 헤라클레스는 성동고를 대표하는 ‘주먹’들이 죄다 모인 불량 서클이었다. 헤라클레스 멤버들은 간신히 퇴학은 면한 학생들이 대다수였다. 다수의 학생들에 비해 수적 열세를 면키 어려웠던 멤버들은 무서울 정도로 단결했다.
헤라클레스가 불량 서클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못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인근 불량배들에게 피해를 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반드시 응징했다. 그렇다고 요즘 조직폭력배들이나 하는 무시무시한 보복은 아니었다. 그저 피해 학생을 찾아가 정식으로 사과를 하게 하거나, 팔 굽혀 펴기 정도를 시킨 뒤 돌려보냈다.
야구부원 겸 헤라클레스 멤버였던 나의 ‘천적’은 체육교사였던 이강법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진심으로 학생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스승이었다.
“하일성, 야구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해? 야구를 하는 것과 불성실한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지. 야구를 하는 사람은 공부와 담쌓고 지내야 하니? 못난 녀석 같으니라고. 공부든 야구든 무슨 일이든 성실하게 해야지.”
내겐 너무 아픈 말이었다. 솔직히 나는 야구를 한다는 핑계로 공부를 게을리 했다. 그렇다고 야구를 아주 열심히 했던 것도 아니다. 공부도 야구도 대충대충이었다. 이강법 선생님의 한마디는 내 인생의 새로운 가르침이 됐다. 이후로 나는 무슨 일이든 성실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예순 살이 넘은 지금도 내가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3학년 때 나는 반장이 됐다. 3학년이 되면 1~3반은 ‘돌반(공부 못하는 아이들로 구성된 반)’으로 구성됐다. 나는 돌반의 첫 번째인 1반의 반장이었다. 반장 ‘완장’에는 친구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선생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3학년 봄소풍 때 나는 ‘공금횡령’이라는 대형사고를 쳤다. 전날 다른 반 반장들과 함께 선생님들의 소풍 도시락 비용을 걷었는데 그만 개인적으로 쓰고 만 것이었다. 거금을 쥔 나는 평소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사먹는 데 공금을 유용했다. 돈을 다 써버린 탓에 도시락 대신 꽈배기 두 상자밖에 살 수 없었다. 결국 선생님들은 학생들 도시락을 나눠 드셔야 했고,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나와 무관한 돈은 절대로 손대지 말자.’ 물론 그 약속은 지금까지도 잘 지키고 있다.
고등학교 때 불량 서클에 가입해 친구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등 악동 짓도 했지만 좋은 친구도 사귀었다. 지금 리틀야구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한영관(프로골퍼 한희원의 부친)이 대표적이다.
나는 영관이 집에서 먹고 잘 때도 많았고, 영관이 부모님은 나를 피붙이처럼 대해주셨다. 영관이와 그의 부모님은 의지할 곳 없는 나에게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금까지도 영관이와 둘도 없는 벗으로 지내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홍콩에 계시던 어머니는 1년에 두세 번 정도 서울에 오셨다. 아버지는 1년에 서너 번 나를 만나기 위해 학교에 들르셨다. 아버지와 나는 늘 학교 앞 식당에서 만났다. 대화도 언제나 똑같았다.
“별일 없니?” “네” “야구는 잘 되니” “네” 용돈은 있니” “… .” 아버지는 말 없이 용돈만 내 손에 쥐어 주셨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모처럼 아버지와 6개월 정도 함께 살았다. 사고 때문이었다. 경기 중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집에 묵어야 했다.
아버지는 원래 속정이 깊은 분이셨다. 하지만 오랜 군생활 때문인지 늘 말수가 적으셨다. 나랑 만나면 대화내용이 언제나 같은 이유도 아버지의 스타일과 무관하지 않았다. 나는 어리광을 피우거나 속 깊은 이야기도 하고 싶었지만 그냥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 헤어져 살았지만 부모님의 깊은 사랑만은 느낄 수 있었다. 두 분은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늘 미안해 하셨다. 돌이켜보면 그게 부모님의 사랑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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