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8시3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때만 해도 정치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한번 멋있게 해보리라. 보란 듯이 남자답게 해보리라. 그러나 이 결심은 공항 도착 직후 무참히 꺾이고 말았다.공항에는 정주영(鄭周永) 당시 국민당 대표, 김광일(金光一) 조윤형(趙尹衡) 최고위원, 정몽준(鄭夢準ㆍ무소속) 의원 등이 나와 있었다. 뜻밖이었다. 전날 홍콩에서 “출마하겠다”고 밝혔던만큼 국민당에서 사람 몇 명을 보낼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당 지휘부가 온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VIP 대기실에 들어서자 정 대표가 나를 반겼다. 나는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정 대표는 내 팔짱을 꽉 끼었다. 국민당 지휘부도 내 주위를 감쌌다. 그리고는 공항 로비 출입문을 나섰다. 정신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사진기자들과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나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 500명은 돼 보였다. 정 대표는 “떨지마”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국민당 당원 수십 명이 우리 일행을 다시 에워쌌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험상궂게 생긴 ‘덩치’ 100여 명이 몰려왔다.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여당이 깡패와 유도선수를 보내 나를 빼돌리려 한 것이다. 공항 로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 버렸다. 패싸움도 그런 패싸움은 없었다. 나는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상대 편인지도 모른 채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검은 색 승용차에 태워질 때만 해도 이 차가 국민당 것인지, 민자당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몸싸움은 결국 여당이 이겼다. 승용차는 현대 것이 아닌 대우의 로얄 살롱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를 곧바로 여의도 SBS 사옥으로 빼돌렸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날 밤 10시 내가 출연한 SBS ‘뉴스 쇼’는 여당이 나를 출연시키기 위해 급조한 생방송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외압은 없었고 출마도 안 합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는 또 한번 좌절했다. 겁이 났다. 시킨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원 출마는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쉬기 위해 홍콩으로 갔을 뿐 다른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정 대표와 개인적인 관계는 유지하겠으나 정치는 절대로 안 할 생각입니다.” “봉두완(奉斗玩) 전 의원으로부터 출마 권유는 받았지만 끝까지 연예인으로 남겠습니다”는 말도 했다.
내가 이렇게 맘에도 없는 말을 하는 사이, 정 대표와 김 최고위원 등 국민당 지도부 10여 명과 당원 100여 명은 SBS 사옥 1층 로비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방송이 끝나자마자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다. 그들은 “정부와 정부의 동반자 서울방송은 공작정치를 그만 두라”며 다음날인 18일 낮12시까지 철야농성을 했다.
40여 분의 생방송이 끝난 후 나는 곧바로 아현동 친구집으로 끌려갔다. 다음날 아침 방송 예정인 SBS ‘출발 서울의 아침’ 제작팀과 인터뷰를 그 집에서 했다. 물론 “외압은 없었고 출마는 안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18일 0시30분께 후배 탤런트 이덕화의 서초동 집으로 피신했다. 정말 쉬고 싶었다.
나는 또 한번 흔들렸다. 몸싸움을 해댄 조금 전 상황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출마를 포기했다. 18일 저녁 나는 아무도 몰래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별장으로 갔다. 제주도에 숨어 있으면서 3월10일 14대 총선 후보 등록마감일까지만 넘기면 모든 게 잘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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