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피아노 5중주의 2악장 리허설을 시작하던 때, 비올리스트가 말했다. “템포 지시가 딱 브람스답지 않아? 안단테면 안단테고, 아다지오면 아다지오일 것이지. 안단테에 운 포코 아다지오까지 붙였네. 거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Andante un poco adagio’를 의역하면 ‘안단테라도 약간 아다지오스럽게’ 연주하라는 모호한 표현이다. 이 밖에도 브람스가 템포를 지시하는 습관을 일별하다 보면 그가 얼마나 신중한 잔소리꾼인지 깨달을 수 있다.
4악장을 시작하는 장면에서도 그는 Sostenuto(깊고 무겁게)라고만 지시하지 않는다. poco(조금만)를 앞에 덧붙인다. 연주자들은 헷갈리기 시작한다. 음악의 흐름에 내맡겨 깊이 몰입하다가도 혹시 과하게 가라앉은 것은 아닌지 늘 스스로 반문해야 한다. 서주에 이어 본격적인 본론이 시작되는 순간 역시 브람스는 Allegro라고 선명히 요구하지 않는다. 뒤이어 ma non troppo(그러나 과하지 않게)라고 소심히 토를 단다. 그뿐인가, 결승점을 향해 장렬히 산화해야 할 Coda 부분에서도 Presto라고 간단히 써두면 될 걸, 또다시 ma non troppo라고 덧붙이고 있다. 질주하는 사람의 뒷덜미를 잡는 격과 같다.
그러니 누군가는 브람스 음악을 심형래 버전의 ‘루돌프 사슴코’에 빗대며 농을 건네기도 했다. ‘달릴까? 말까?’ 애간장을 태워도 너무 태운다는 것이다. 나는 극작가 브레이트를 떠올렸다. 몰입을 방해하는 연극의 ‘소외효과’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런 소심함의 백미는 그의 교향곡 1번 4악장에 등장한다. Allegro non troppo ma con brio(알레그로, 과하게는 하지마. 그래도 생기는 있어야!)
피아노 5중주는 4중주에 비해 현악기군으로부터 피아노가 완벽히 독립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보통의 화음은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등 4개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현악 4중주단은 이 네 개의 층위를 각각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에 의해 이미 완결된 형태로 연주가 가능하다. 하지만 피아노 4중주의 경우, 현악기 주자가 세 명이니 그들이 메우지 못하는 음역을 피아니스트가 바쁘게 채워야 한다. 이 노동은 안 하면 대번에 티가 나고, 반면 열심히 한다 해도 별로 티 나지 않는, 이를테면 ‘뽀다구’(이런!)가 모자란 중노동이기 마련이다.
피아노 5중주는 이처럼 현악기군이 이미 완성된 화성을 형성하고 있다. 때문에 피아니스트로선 독립적이고도 자유로운 행보가 가능해진다. 어느 때엔 마치 협주곡을 연주하는 솔리스트처럼 스트링과 당당히 대적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가볍고 귀엽게 동동거리던 춤사위가 육중한 하중을 덧대어 전투력을 더하는 마지막 악장의 패시지들이 그러하다.
브람스의 투쟁적인 악절에서 흥미로운 것은 피아니스트의 왼손과 똑같은 선율로 움직이는 첼리스트의 동선이다. 이렇게 저음역이 중음으로 덧대어 연주되면 음색 자체의 하중이 무겁고 두터워 질 수밖에 없다. 브람스가 화성을 배치하는 방식은 낮은 음역에 빽빽이 몰려 있다. 반면, 그와 동시대에 활동한 슈만은 브람스에 비해 화성의 배치가 열려있어 공기의 순환이 자유롭다.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악절에서도 슈만이 고음역의 악기를 활용해 화려한 공중전을 선호한다면, 브람스는 첼리스트를 앞세워 육중하게 움직이는 지상전을 선호할 듯 하다.
마지막 악장은 론도의 유장한 반복을 거치며 코다에 이른다. 악기들은 낮은 음역부터 시작해 천천히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며 올라온다. 그의 인성은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는 순간에도 여실히 드러나, 앞서 언급했던 대로 Presto라 명료히 지시하는 대신 non troppo를 부연하며 연주자에게 ‘절제’와 ‘객관성’을 요구한다. 차곡차곡 쌓아온 갈등을 폭발시켜야 하는 순간, 그의 음악은 불꽃을 발하며 산화하지 않는다. 대신 육중하게 목구멍 뒤로 삼켜 버린다. 이렇게 내장에 쌓인 불발탄은 억제된 듯 응결된 브람스 특유의 ‘두터운 추동력’의 근원이라 할 것이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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