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아이돌그룹 ‘AKB 48’이 데뷔 11주년을 맞이했다. 도쿄의 번화가 아키하바라(秋葉原)를 거점으로 아저씨 팬들을 확보하며 영역을 넓혀온 세월이다. 매년 진행되는 멤버 교체 인기 투표에서 연습생들은 48명의 멤버에 포함되기 위해 국회의원 선거전을 방불케 하는 격전을 치른다. 아키하바라의 48인 모델은 일본 전역으로 번지며 곳곳에서 자매그룹이 탄생하기도 했다. 때문에 AKB48의 성공스토리는 단순한 팬덤을 넘어 일본 기업들의 마케팅전략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아키하바라를 근거지로 매일 정기공연
AKB 48은 2005년 2월 데뷔했다. 종합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秋原康ㆍ57)가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아이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동네 친구나 여동생처럼 편하게 접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시작은 미약했다. 일본 오타쿠 문화의 성지인 아키하바라에 마련한 전용극장에서 열린 첫날 공연에는 관객이 단 7명에 불과했다. 당시 멤버 20명보다 적었다. 귀엽기는 하지만 ‘연예인’이란 선입견을 무색케 하는 평범한 외모에 눈길을 줄 관객이 없었던 것이다.
AKB 사단은 그러나 조급하지 않았다. 대신 아키하바라의 전용극장을 무대로 조금씩 전진하는 우보(牛步)전략을 택했다. 특히 멤버들의 연습무대를 일반에 공개함으로써 관객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멤버를 집중적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했다. 미완성의 아이돌을 팬들이 ‘프로’로 성장시킨다는 콘셉트는 고독한 ‘연습생’시절을 거치는 한국의 아이돌 입문패턴과는 대조적이다.
AKB 사단은 또 만화와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코스프레 의상, 메이드 카페 등 독특한 일본문화가 넘쳐나 별천지 같은 아키하바라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AKB극장 앞에는 멤버들의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는 전용매장도 개설했다. 이 곳을 ‘AKB 타운화’하고 멤버의 상품화를 통해 별도의 수익창출도 끌어내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 뺨치는 멤버교체 인기투표
AKB48의 인기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계기는 멤버교체를 위한 인기투표다. 2009년 ‘1회 선발총선거’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뒤 매년 진행되는 인기투표에는 정식멤버와 연습생을 포함해 130여명이 넘는 경쟁자가 등장한다. 몇 개 소그룹으로 나누더라도 무대는 항상 좁기 마련이다.
인기투표를 통해 매년 10명 정도의 멤버가 교체되지만 핵심은 앞 줄에 서는 10여명 멤버의 선발이다. TV무대에서도 앞 줄에 선 멤버가 카메라에 부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국 팬들의 투표를 통해 20명 정도의 선발 멤버를 추리는데 1위에 오르면 방송출연에서 대표로 활약하게 된다. 이른바 ‘센터’다. 새로운 센터 탄생을 기념하는 싱글곡도 멤버의 이미지를 일신하는 이벤트로 만들어진다.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인기투표는 이제 일본열도의 국민적 이벤트 반열에 올랐다. 후지TV는 각 멤버의 득표수를 실시간 자막처리하고 투표장인 도쿄의 부도칸(武道館)과 오다이바 스튜디오를 연결하는 이원방송으로 흥분을 극대화 시킨다.
매년 초여름 치러지는 인기투표에서 팬들의 투표열기 또한 분위기를 가열시킨다. 투표권은 AKB48의 음반이나 카드 등을 구입한 뒤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투표 현장에 가서 직접 1표를 행사할 수 있다. 자신이 응원하는 멤버를 당선시키기 위해 카드 수 백장을 사재기하는 광경도 흔하며 특정 팬들이 모여 선거대책본부를 발족하는 진풍경도 볼 수 있다.
투표인단의 규모는 가히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09년 5만명 수준이었지만 2011년 116만명을 넘어섰고, 지난해 6월6일 열린 7회 이벤트에는 무려 328만명이 참가했다. 2014년엔 멤버들의 총득표수가 도쿄도지사 당선자의 득표수를 넘어서는 진기록을 낳기도 했다.
멤버들의 표심잡기도 국회의원 선거를 방불케한다. 1위부터 80위까지 랭킹이 매겨지는 선발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멤버들은 거의 사투를 벌인다. 특히 연설 대결은 백미로 꼽힌다. 지난해 4위를 차지한 1기 출신 다카하시 미나미는 “나 따위가 센터에 도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1위가 되고 싶습니다. 270명이 출마했지만 결국 무대에 선 것은 80명입니다. 어떻게 분발해 인기를 얻는지 모두가 고민해야 합니다. 미래는 지금입니다. 지금 노력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라는 감동적인 연설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퇴출 멤버는 지방과 해외로 자매그룹 전파
AKB사단이 장수할 수 있는 비결로는 국내외로 번지는 자매그룹을 꼽을 수 있다. 일본 연예계에서는 아이돌 그룹의 수명을 통상 3~5년으로 치고 있지만 AKB48는 자매그룹으로 팬층을 확장시키면서 수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대교체도 한몫하고 있다. AKB48는 일종의 학교 개념을 도입해 오래된 멤버들을 순차적으로 ‘졸업’시키는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다. 춤과 노래, 연기력을 연마한 멤버들은 배우나 솔로가수 등 더 높은 꿈을 향해 AKB48을 탈퇴한다. 진출분야도 다양한데, ‘AKB 가위바위보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던 한 졸업생은 한인타운인 신오쿠보(新大久保)에서 불고기가게를 열어 장사진을 친 남성팬들로 대박을 경험하기도 했다.
AKB사단의 신화에는 눈물겨운 연습생 스토리도 빠질 수 없다. 그렇다고 ‘빨리 빨리’만 외치는 한국의 아이돌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일본 음반업계 한 관계자는 “정신없이 몰아치는 게 특징인 K-Pop이 지금은 잠잠해졌다”며 “화려한 K-Pop보다 성장스토리를 함께 만드는 AKB48류 문화가 일본에서 뿌리내렸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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