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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양자역학 국정교과서

입력
2015.10.24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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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에는 양자역학 교과서가 스무 권 있다. 양자역학은 물리학과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다. 현대물리학의 정체성은 양자역학의 확률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물리학자들 책장에도 양자역학 교과서가 아마 가장 많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과학 교과서가 그리도 많은 점에 의아해하기도 한다. 자연의 근본 질서를 탐구하는 과학이라면 정답이 하나 있는 공부를 하는 셈인데 굳이 교과서가 그리 많을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오해가 있다. 과학에서의 ‘정답’은 언제나 검증의 시험대에 오른다. 그 정답이 얼마나 높은 정밀도에서 성립하는지 항상 확인한다. 그 결과 ‘정답’이 ‘오답’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과학에서의 ‘정답’이란 임시적이다. 훌륭한 과학교육은 정답을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정답의 한계를 가르치는 교육이다. 과학의 위대한 발견은 정답이 오답으로 바뀔 때 자주 등장했다.

상황이 이렇다면 정답을 바라보는 관점이 학자들마다 제 각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과서가 많아진다. 이는 과학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다. 북한산은 하나이지만 거기에 오르는 길이 수십 가지인 것이 서울시민에게 축복인 것과도 같다. 리보프의 양자역학은 행렬역학적 수리 전개가 일품이고 가시오로비츠의 양자역학은 파동함수적 논리 전개가 깔끔하며, 와인버그의 양자역학은 대가의 숨결이 느껴진다.

만약 전 세계의 지도자급 과학자들이 모여 단 하나의 교과서를 정해서 그것으로만 양자역학을 공부하라고 했다면, 나는 일찌감치 물리학을 포기했을 것이다. 물리학이 가장 성공적인 과학 분야로 기록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 20세기 초 소련에서는 양자역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외면을 하기도 했다.

권력층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침묵을 강요당한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갈릴레오였다. 1616년 로마 교황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못하게 했다. 곧이어 코페르니쿠스의 역작 ‘천체 회전에 관하여’는 금서로 지정되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저작 ‘두 체계의 대화’가 1616년의 결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았고, 책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1633년 6월의 일이다.

나는 역사를 잘 모른다. 하지만 단순한 사실(fact) 너머의 진리와 진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자연과학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확신한다. 하나의 ‘올바른’ 정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백 가지의 오답 가능성을 허용하는 것이 참된 역사교육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국가가 단 하나의 양자역학 국정교과서를 만들겠다는 것만큼이나 우습고도 어이없는, 하지만 대단히 무서운 발상이다. 이는 학문의 자유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인류문명에 대한 가혹하면서도 야만적인 테러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오의 후예로서, 나는 이 반문명적 폭거를 규탄한다.

이종필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BK사업단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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