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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일과 삶 밸런스.. 뺏기듯 떠밀려 쓰는 연차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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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일과 삶 밸런스.. 뺏기듯 떠밀려 쓰는 연차휴가

입력
2016.04.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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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 비용절감에만 집착

상사 마음대로 날짜 정하거나

주말과 붙여 쓰기 금지 등 조건

근무 대기 시켜놓고 휴가 처리도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한다는 회사 취지야 좋죠. 그런데 연차휴가도 제가 쉬고 싶을 때 써야 의미가 있지 않나요?”

국내 한 대기업 2년 차 직장인인 이모(26)씨는 얼마 전 갑자기 연차를 쓰게 됐다. 업무특성 상 야근이 많아 평소 연차 쓰는 부서원이 적은 것을 문제 삼은 부서장이 강제로 날짜를 배정해 전원 연차를 사용하라는 특별지령을 내린 탓이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지만 이씨는 다음 달 예정된 신제품 출시 업무를 도맡은 터라 휴가 중에도 격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27일 “연차 이틀 내내 업무용 노트북을 갖고 집에서 일을 했다”며 “쉬는 것도 강제가 되면 정작 계획했던 휴가 일정은 짧아지게 돼 되레 휴식을 빼앗기는 기분”이라고 토로했다.

최근 기업들이 일과 삶의 양립을 강조하면서 직원들에게 연차 사용을 장려하고 있으나 업무 일정이나 상사 주관에 의한 ‘강제 휴식’ 사례가 빈번히 발생해 개인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들의 연차 중시 분위기는 꾸준히 확산되고 있다. 충분한 휴식이 업무 능률과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자리잡은 데 따른 것이다. 여기엔 근로자가 연차를 다 소진하지 않을 경우 사용자가 수당을 지급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25일 ‘연차휴가 사용 촉진을 위한 경영계 지침’을 발표하면서 “연차휴가는 근로자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부여하고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밝혔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 기업들이 연차를 권장하는 주된 목적은 비용 절감용이라는 평가가 많다. 올해 1월 한 중소기업에 입사한 최모(25)씨는 근로기간이 1년이 안 돼 한 달을 개근하면 하루의 연차가 생긴다. 지난달까지 3일의 휴일이 생겼지만 마음 놓고 쉬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회사는 연차 사용을 권고하면서도 “이틀 이상 붙여 쓰지 말고 금요일을 제외한 평일에 쉬라”는 조건을 걸었다. 최씨는 매주 프로젝트 할당량이 있어 휴무를 쓰면서 프로젝트도 준비해야 했다. 그는 “팀 메신저를 통해 업무 관련 지시도 계속해서 내려온다”며 “일을 떠나 쉴 수 없다면 차라리 정상 출근을 하고 수당을 받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푸념했다. 지난달 취업포탈 잡코리아가 직장인 53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연차를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응답은 44.7%밖에 되지 않았다. 이유로는 ‘상사 눈치가 보여서(66.0%)’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매달 근무 일정이 새로 짜이는 직장인들의 경우 연차 사용 결심을 하기도 전에 휴식 권리가 날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나 공항에서 일하는 항공사 직원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 소재 한 대형병원에서 근무하는 김모(29)씨는 “출근 두 시간 전에 환자가 없어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을 때가 종종 있는데 연차를 쓴 것으로 처리되곤 한다”며 “그러고도 혹시 위급 환자가 입원할까 봐 반나절 이상 대기하는 날이 대다수”라고 말했다. 근로자와 사전 협의 없이 강제로 연차가 소진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연차를 근로자의 필수 권리로 인식해 휴식에 대한 실질적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기업 문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생산성 향상은 물론 정부가 강조하는 일과 가정의 양립 차원에서 연차휴가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기업들이 연차를 정부 정책에 부응하기 위한 방편이 아닌 직원들의 자기선택권을 존중하는 기업 가치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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