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은 담장 넘어 고속도로까지, 48년간 넘보지 못한 투포환 기록
"쓰레기 같은 공 짜증" 야구 접은 뒤 미식축구 데뷔전도 전설로 남아
인종차별 만연하던 1950년대, 링 위에서는 차별 없었던 피부색
현대인은 왜 스포츠에 열광할까? 앨리스 캐시모어라는 문화사회학자는 우리의 삶이 너무 뻔하고(predictable) 점잖고(civil) 안전해서(safe)라고 했다.(스포츠, 그 열광의 사회학) 뻔한 기량으로는 돋보일 수 없고 투지 없이는 이기기 어렵고 하나도(한번도) 안 잃고 전부(언제나)를 챙길 수 있는 스포츠는 없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수긍할 만하다. 어쩌면 저 특징은 현대적 삶의 경향성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캐시모어의 설명이 스포츠 열광의 모든 이유를 포괄하지는 못한다. 아니 그에게 정면으로 맞서볼 수도 있다. 세월과 함께 스포츠는 점점 뻔해지고 점잖아지고 안전해져 왔다고 말이다. 스포츠의 과학화와 정보의 확산으로 ‘다크 호스’란 대개는 과장된 전설이고, 그 결과 어떤 종목에서든 스타 선수 두어 명의 잔치가 돼가고 있고, 세분화한 규칙과 규정 또 종목의 경계에 갇혀 옛적의 분방함을 잃어가고 있다고, 그래서 점점 더 안전해져 가고 있다고 말이다. 어쨌건 현대인의 삶이 점점 뻔하고 점잖게, 스릴도 모험도 없이 권태로워져 가는 것만은 수긍할 수 있다. 스포츠조차도 말이다.
나이든 스포츠 팬들이 이런저런 자리에서 각자가 좋아하는 종목의 영웅들을 추억할 때, 가령 51년 조 루이스와의 경기에서 로키 마르시아노의 훅이 어땠고, 전성기의 무하마드 알리가 어땠고, 마이클 조던의 3단점프와 루 게릭의 39년 은퇴경기가 어땠고…, 김일과 여건부의 환상 콤비 플레이가 어땠다는 이야기를 할 때, 다시 말해 공인된 데이터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신화와 전설의 영역을 넘나들어도 좋을 그런 때, 그들은 자신의 영웅 이야기 안에 그 시절 스포츠와 거기 열광했던 자신의 다이내믹했던 시간에 대한 향수를 뒤섞곤 한다.
LA타임스에서 만 38년(1961~98)을 스포츠기자 겸 칼럼니스트로 일했고, 1990년 퓰리처상을 탄 전설의 체육기자 짐 머레이에게도 그런 선수가 있었다. 찰리 엘빈 파월(Charlie Elvin Powell)이었다. 지난 세기의 절반을 온갖 종목의 경기장에서 보낸 그는 98년 작고하기 직전 쓴 칼럼(제목은 ‘Powell is All Contention’이다)에서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c최고의 스포츠맨을 꼽으라면 “단연 찰리”라고 말했다. “짐 소프(육상과 미식축구, 야구선수로 활약)도 재키 로빈슨(메이저리그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리그 전 구단 영구결번 지정 선수)도 헤비급 프로복싱 챔피언과 시합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마이클 조던도 커브볼은 치지 못했다.”하지만 찰리는 해냈다. 그가 9월 1일 숨을 거뒀다. 향년 82세.
미국 서부지역 최강의 스포츠 명문 고교인 샌디에이고고교 재학시절, 그가 친 공이 샌디에이고 밸보아스타디움 담장을 넘어 고속도로 입체교차로까지 예사로 날아가곤 했다는 이야기, 100kg이 넘는 거구로 높이뛰기 멀리뛰기 선수로 활약했고, 육상 100야드(91.44m)를 9.6초에 주파했다는 이야기, 투포환에서 고교시절 세운 20.01m 기록은 이후 48년 동안 누구도 넘볼 자가 없었다는 이야기, 미식축구 대표선수이기도 해서 오전에 육상 경기에 출전했다가 차 안에서 숄더 패드 같은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경기장에 뒤늦게 들어서곤 했다는 이야기, 10대 초반 시작한 권투에서는 자신보다 예닐곱 살씩 많은 동네 형들조차 그와 맞서길 꺼렸고,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켜야 했을 때가 허다했다는 이야기…. 무슨 만화 주인공 같은 저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찰리 파월이다. 한마디로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다만 그를 맞이한 세상은 이미 ‘만능’보다는 ‘전문’을 대접하던 시절이었다.
찰리 파월은 1932년 4월 4일 미국 댈러스에서 태어났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절, 미국 남부에서 그의 아버지 조니 마틴은 흑인만 출전할 수 있는 시합에서 명성을 떨치던 테니스 선수였지만 그걸로 돈을 벌지는 못했고, 생계는 건설 현장노동자(미장공)로 꾸려가야 했다. 집은 가난했고, 파월은 9남매의 둘째이자 장남이었다. 가족은 파월이 5살 되던 해에 아버지의 일거리를 따라 샌디에이고로 이사한다.
파월은 어려서부터 뭐든 몸 쓰는 데 능했다고 한다. 그 시절 가장 각광받던, 그리고 흑인들이 도전해볼 만한 운동이 복싱이었다. 파월은 동네 복싱 도장에 다니게 되고, 거기서 훗날 장장 10년간(1952~62) 라이트헤비급 세계챔피언 벨트를 지킨 아키 무어(Archie Moore, 98년 작고)를 코치로 만난다. 2000년 LA타임즈에 실린 한 칼럼에 파월이 들려준 당시 이야기가 실려 있다. “2차대전 때니까 내가 열두세 살 무렵이다. 오크스 보이클럽이라는 데서 권투를 했는데, 스파링 상대는 늘 17~19살 형들이었고 대개는 KO로 이겼다.” 웰트급과 미들급 챔피언(1936~50)이었던 찰리 벌리(Charley Burley, 92년 작고)에게서도 그는 기본기를 익힌다. 찰리는 무어가 미들급이던 44년 그를 이긴 전력이 있는 실력자였다. 그들은 모두 파월에게서 챔프의 미래를 봤다고 말했다.
51년 파월은 남부캘리포니아 미식축구 올해의 선수상을 탄다. 193cm 신장에 103kg의 근육질 육체. 파워와 근성, 스피드에 민첩성까지 갖춘 그에게 무려 12개 프로팀이 입단 제의를 한다. 종목도 프로야구 미식축구 프로농구 등 다양했다. 당시 LA다저스 부회장이던 프레스코 톰슨은 그에게 “얘야, 뭘 원하니? 경력(야구)이니 절름발이(미식축구)니?”라며 설득했다는 일화도 있다. 저 유명한 시범농구단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에서도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UCLA 등 지역 대학들도 그에게 장학금을 제의하며 입학을 권한다.
그 중 그가 선택한 것은 지역 연고 프로야구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였고, 스무 살의 그는 2군 소속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야구 경력은 여름 한 철로 끝난다. “투수들이 쓰레기 같은 공만 던져대는 것에 짜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고향 선배이자 메이저리그 마지막 4할타자(1941년 시즌타율 4할6리) 기록을 보유한 테드 윌리엄스(2002년 작고)는 “파월이 포볼을 기다릴 줄만 알았다면 메이저리그의 거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를 평했는데, LA타임즈의 짐 머레이는 그 말을 받아 “윌리엄스는 그의 생애 동안 스트라이크가 아닌 공을 쳐본 적이 없지만, 찰리는 어떤 공도 안 쳐낸 게 없었다”고 썼다.(1998.3.19)
야구복을 벗어 던진 그 해, 파월은 아메리칸풋볼리그(AFL)의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49ers)에 입단한다. 스타 선수이자 명 코치로 이름을 날리던 벅 쇼(Buck Shaw, 77년 작고)가 파월의 집에까지 찾아와 설득한 거였다. 그는 보너스 2,000달러에 연봉 5,500달러의 프로 미식축구 선수가 됐고, 수비팀의 디팬시브 엔드로 나선 첫 출전 경기에서 디트로이트 라이언스의 전설적인 쿼터백 바비 레인을 무려 10차례나 ‘색(sack)’했다는 전설을 남겼다.(‘색’이란 미식축구에서 수비팀이 공격팀의 센터, 가드, 태클의 벽을 뚫고 그 벽 뒤에서 공을 든 쿼터백을 제압해 공격 기회를 빼앗는 기술.) 그것이 전설인 까닭은, 미식축구의 공식 기록이 시작된 게 1982년부터이기 때문인데, 공인된 바로는 90년 11월 캔자스시티 칩스와 시애틀 시호크의 경기에서 나온 7차례 색이 단일경기 최다 기록이다. 대다수 미국 언론이 받아쓴 파월의 저 경이로운 데뷔무대 기록은 그러니까, 경기장이나 TV를 통해 경기를 본 사람들, 특히 49ers 팬들의 흥분된 기억에 의존한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그의 부고 기사에서 저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며, ‘프로풋볼 레퍼런스’라는 비공인 기관이 집계한 바, 그 경기에서 5차례의 색이 성공했다고 전했다. 어쨌건 파월은 49ers의 최연소 주전 수비수이자 당시로선 극히 드문 흑인 선수로서 첫 출전 경기서부터 스타였다. 그는 57년까지 다섯 시즌 55개 경기에 출전했다.
또 그는 프로 복서였다. 미식축구로 두 시즌을 뛰고 난 1953년 말 그는 헤비급 복서로 데뷔전을 치러 승리하고, 54년 한 해 동안 복싱에 전념한다. 55년부터 3년간은 다시 미식축구. 57년 미식축구를 그만 둔 파월은 이후 4년간 11개 경기를 연달아 KO승으로 장식하며 명성을 날린다. 그 가운데 7개 경기는 2라운드를 넘기지 않았고, 59년 마이애미비치에서 쿠바의 ‘거인’ 니노 발데스(당시 세계랭킹 2위)를 KO로 제압, 단숨에 세계랭킹 4위에 오른다. 당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복싱 전문기자였던 모트 샤니크는 훗날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50년대 초반부터 이미 많은 이들이 로키 마르시아노의 뒤를 이을 복서는 찰리일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2000.11.27)
샤니크는 “다만 문제는 복싱을 하다가 미식축구로 돌아설 때마다 몸무게를 왕창 불려야 했다는 거였다. (…)반대로 49ers에서 링으로 돌아올 때는 260파운드(117kg)에서 212~215파운드(95~96kg대)로 빼야 했다. 만약 파월이 두 종목을 함께 하지만 않았다면 그는 정말 뭔가를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샤니크도 모르던 게 있었다. 파월은 2000년 ‘더 타임스’인터뷰에서 그 사연을 고백했다. “다들 축구를 포기하고 권투에 전념하라고 했고, 그들이 옳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몸무게뿐 아니라 두 운동에 필요한 근육부터 다르다.(…) 하지만 복싱에 전념하려고 했을 땐 이미 (축구하면서 입은) 손목 등 부상이 적지 않았다.”
찰리는 60년 복싱을 그만두고 오클랜드 레이더스에 입단, 두 시즌 동안 다시 미식축구 선수로 뛴다. 그리고 62년 다시 복싱. 하지만 30대로 접어든 그의 파워와 기량이 예전 같지 않았거나 경쟁자들의 기량이 예전 같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 복서로서 내리막길을 걷는데, 모진 상대를 만난 탓도 없지 않았다. 63년 그는 캐시어스 클레이와 맞붙어 3라운드 KO패를 당하고, 64년 플로이드 패터슨에게도 패한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훗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한 바로 그였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패터슨은 로키 마르시아노의 56년 은퇴 선언 직후 챔프 벨트를 이어받은 전 챔프였다. 65년 그는 복서로서의 삶을 접는다. 통산 전적 25승(17KO) 11패 3무였다.
그는 고교시절 임시 소방대원으로 산불을 끄러 다닌 적도 있고, 다운타운에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돈을 번 적도 있다고 말했다. 흑인 빈민가 험한 동네에 살면서 9남매가 시리얼에 우유 대신 물을 부어 끼니를 때울 만큼 살림이 어려웠는데, 미군 연습장에서 복싱을 배울 때 가끔 주방장이 잘 먹으라며 싸준 고기덩이를 갖고 올 때면 묘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동생들 가운데 단 한 명도 단 한 번도 마약으로 말썽을 빚거나 소년원 신세를 진 적이 없었다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당연히 장남으로서 가계를 돕고 동생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곧장 프로무대를 선택한 것도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야구보다는 프로축구가 그나마 연봉이 좋던 때였다. 그의 49ers 첫 연봉 1만2,000달러는 요즘으로 치자면 웬만한 선수의 한 경기 출전료에도 못 미치는 돈이었지만, 당시는 NFL이 출범하기 전이었고 당연히 슈퍼볼도 없던 때였다. 인종 차별이 심한 도시에 원정경기라도 가면 같은 팀이라도 흑인 선수는 다른 호텔에서 잠을 자던 시절이었다. 그의 마음이 자꾸 복싱으로 기운 데는 그런 저런 사정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잘만 하면 복싱이 가장 돈이 되던 운동이었고, 링 위에서는 피부색으로 차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모든 운동을 다 좋아했다는 점도 무시하기 힘들다. 80살이던 2012년 ‘유니언 트리뷴 샌디에이고’인터뷰에서 그는 어떤 종목을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에 “모든 스포츠를 좋아한다. 한 종목의 시즌이 끝나면 새 시즌이 시작될 때가지 기다릴 수 없었다. 트랙에서 야구장으로, 필드에서 축구장으로…, 모든 게 즐거웠다.” 동네 친구이자 초등학교 동창으로 그와 결혼해 58년을 함께 산 얼마 웨슨은 “찰리는 어떤 경기를 하든 경기장에 있을 땐 늘 행복해하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은퇴 후 찰리는 항공장비 판매업과 산업용 세척제 납품업자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그는 숱한 길을 누볐지만 길 위에 미답의 여백을 남겼고, 팬들의 신화 안에서 모든 길의 끝에 도달했다. 거기서 찰리의 미식축구 데뷔전 색 기록이 5차례냐 10차례냐는 가치를 잃는다. 짐 머레이의 편애 역시 저널리스트가 아닌 팬으로서의 평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찰리처럼 운동할 수 있었던 시절, 그렇게 영웅이 될 수 있던 시절을 편애한 걸지도 모른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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