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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순교의 얼로 지은 소박한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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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순교의 얼로 지은 소박한 천주교회

입력
2016.06.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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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지어진 구산성당의 정면 모습. 안창모 제공
1956년 지어진 구산성당의 정면 모습. 안창모 제공

한국 천주교회 역사의 현장이 사라지기 직전이다. 한국 최초의 서양인 신부인 모방(Maubant) 신부가 은거하며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소년을 마카오신학교에 보내 오늘의 천주교회를 만든 곳이다. 박해(1839)에도 굴하지 않았고, 6.25전쟁 당시 신부와 신학생들을 지켜낸 곳! 하남시 구산마을이다. 1830년대 순교성인 김성우를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최근까지 구산마을은 원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한, 귀중한 교회와 순교의 얼이 살아있던 곳이다.

구산성당 내부. 제단이 옮겨졌다. 안창모 제공
구산성당 내부. 제단이 옮겨졌다. 안창모 제공

그러나 박해와 도시화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켜왔던 구산마을이 LH(토지주택공사)의 개발 광풍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주민들은 아파트로 가득 찬 신도시와 주변으로 흩어졌고, 성당만이 마을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다. 지난 6월25일, 6.25의 기억을 안고 있는 구산성당을 다녀왔다. 2016년 6월 5일 오후5시 마지막 미사 후 성당 내 제단은 치워졌다. 성당 주변도 깨끗하게 비워졌다. 마지막 남은 성당이 철거되면 그 자리에는 아파트형 공장이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택지개발지 한복판에 놓인 구산성당. 안창모 제공
택지개발지 한복판에 놓인 구산성당. 안창모 제공

분명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아파트 천지로 변한 세상에 무척이나 익숙한 우리다. 그러나 구산성당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성당의 역사가 예사롭지 않다. 200년 가까이 유지되어온 신앙공동체인 구산마을은 신앙의 자유를 상징하는 명동성당 건립을 몸으로 지원했다. 명동성당 소속이었던 구산마을 공소는 교구 분리로 약현성당 소속이 되었고, 44인의 순교성인이 탄생한 서소문 참형 터를 지키는 약현성당 건립도 지원했다. 이후 혜화동, 신당동, 천호동, 경안, 신장성당 소속의 공소를 거쳐 구산성당이 되었다. 오랫동안 ‘떠돌이 공소’였지만, 상주 신부 없이 신앙공동체를 유지했던 공소는 교회 성장의 역사이자 근현대사의 현장이다. 전쟁 중 윤공희 주교와 신학생이 피신했던 것을 계기로 오랫동안 서울의 여름 신앙학교 터이기도 했다. 1956년 지금의 성당이 지어졌다. 신도들이 직접 한강에서 채취한 모래와 자갈을 시멘트로 비벼 벽을 세우고, 노기남 대주교가 보내준 명동성당을 짓고 남았던 목재로 만든 성당이다. 고딕건축으로 지어졌지만, 장식이 없어 소박하고 돌과 모래를 나른 마을 사람들의 신심이 묻어나는 성당이다.

구산성당 전경. 안창모 제공
구산성당 전경. 안창모 제공

그런데 미사강변지구 개발은 이 모든 것을 지우고 있다. 성당이 지어진 지 올해로 60년이 되었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인데, 구산성당은 오히려 철거되는 운명이 되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위기의 건축유산을 보호하는 ‘등록문화재’ 제도가 있다. 구산성당은 마을과 교회를 넘어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역사와 가치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성당을 문화재로 등록하고,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 철거를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철거 대신 성당 옮기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위기의 성당을 남길 수 있을지, 있다면 현 장소에 남길지, 아니면 옮겨서 정신과 역사를 이어갈지를 결정할 때가 임박했다.

안창모 경기대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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