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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에 종속 당한 대한민국… 칼 폴라니에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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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에 종속 당한 대한민국… 칼 폴라니에 길을 묻다

입력
2015.04.24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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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 칼 폴리니 지음·홍기번 옮김 착한책가게 발행·422쪽·2만4,000원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 칼 폴리니 지음·홍기번 옮김 착한책가게 발행·422쪽·2만4,000원

국가냐 시장이냐 이분법 탈피

계획경제와 시장경제 공존하는

다원적 발전 모델 제시

"폴라니식 사고는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가

삶을 풍요하게 하는 것이 경제"

칼 폴리니 지음·홍기빈 옮김 길 발행ㆍ376쪽ㆍ2만5,000원
칼 폴리니 지음·홍기빈 옮김 길 발행ㆍ376쪽ㆍ2만5,000원

1939년 아내 일로나 두크즈네카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는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으로 대사상가 반열에 오른 폴라니는 타자보다 수기를 선호했고, 그의 모든 저작은 노동운동가였던 아내가 타자기로 기록해 보관했다. 그녀는 남편 사후에도 폴라니의 강의노트 등을 정리하는데 공을 들였다. 칼 폴라니 정치경제연구소 제공
1939년 아내 일로나 두크즈네카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는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으로 대사상가 반열에 오른 폴라니는 타자보다 수기를 선호했고, 그의 모든 저작은 노동운동가였던 아내가 타자기로 기록해 보관했다. 그녀는 남편 사후에도 폴라니의 강의노트 등을 정리하는데 공을 들였다. 칼 폴라니 정치경제연구소 제공

‘국가냐 시장이냐’는 철 지난 논쟁일까. 케인즈의 국가개입주의와 하이에크의 시장근본주의는 차례로 극명한 한계를 드러냈다. 그러는 동안 두 사조가 쏟아낸 침체, 양극화, 대량실업 등 부작용은 인류사에 깊은 골을 팼다. 자, 그럼 이 분투의 승자는 어느 쪽인가. 두 차례 실패 후 우리가 택한 대체재는 무엇인가.

시장실패를 재차 백일하에 드러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헝가리 출신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1886~1964)를 불러냈다. 2012년 다보스 포럼에서는 세계적 엘리트들의 논의 과정 내내 “폴라니의 유령이 떠돌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는 이미 70여 년 전 ‘자기조정 시장경제’라는 신화는 망상에 불과하며 인류 고통의 원인이 인간, 자연, 토지의 상품화에 있다고 단언했다. 또 국가와 시장의 이분법에서 탈피해 “시장경제, 사회적 경제, 공공부문, 생태가 조화를 이루는” 다원적 발전 모델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는 캐나다 몬트리올 콩코르디아 대학 산하 칼 폴라니 정치경제연구소 문서고에 보관된 폴라니의 미출간 원고, 학술회의 연설문, 강의노트 등을 모아 엮은 책으로 지난해 영어판이 출판돼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각 글은 1919~1958년 작성된 것으로 1944년 출간한 ‘거대한 전환’ 완성 전후 영국과 미국에서 한 강연 원고도 포함됐다.

이 책에서 폴라니는 시장의 자기조정 능력에 대한 맹신이 불러온 폐해를 조명한다. 특히 1919년 완성된 미출간 에세이 ‘오늘날의 중요한 문제: 답변’은 그가 이미 이 시기에 자기조정 시장과 국가주도 중앙계획 경제 모두에 대해 선을 명확히 긋고 있음을 보여준다.

칼 폴라니 1923년 모습. 칼폴라니정치경제연구소 소장.
칼 폴라니 1923년 모습. 칼폴라니정치경제연구소 소장.

그는 자본주의의 등장이 “결코 필연적이지 않았다”며 이렇게 지적한다. “영국 프랑스 대혁명의 목적은 경제적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혁명은 완수되지 못했다. 토지에 대한 독점이라는 봉건적 제도가 혁명 뒤에도 살아남았고, 그 결과 새로운 힘들을 거꾸로 뒤집어버렸다… 오늘날 경제를 지배하는 것은 자유가 아닌 독점이다.”

그러면서도 “오늘날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협동적 경제가 공산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라며 “협동적 경제는 오로지 자유로운 협동과 자유로운 교환이 자유롭게 상호작용을 맺을 때에만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노동을 하게 만드는 유인이 경제적 동기 하나뿐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며 케인즈나 하이에크식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한다. 폴라니는 이 같은 바탕에서 노동, 소비, 생산이 모두 자신을 대변할 대표자를 통해 여러 문제를 조화롭게 해결하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협동적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은 이렇게 각 영역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경제체제의 한 모델을 18세기 서아프리카에서 찾아낸 연구서다. ‘거대한 전환’외에 본인이 직접 완성해 내놓은 유일한 책이기도 하다. 폴라니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계획경제와 활발한 시장의 공존 질서를 마련한 다호메이의 뛰어난 행정기술이다.

일례로 다호메이에는 시장이 많았지만 이들은 모두 이익 추구의 각축장이 아닌 정교하게 설계된 물자 유통의 창구였다. 카우리 조개를 묶은 화폐의 발행량은 철저히 사전에 계산됐으며 이를 통해 불필요한 독점, 영리상업의 발달, 과도한 이윤추구 가능성이 차단됐다. 강력한 중앙계획경제나 공산주의를 옹호하지 않은 폴라니에게 다호메이는 계획과 시장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경제 모델의 실마리를 제시했다.

두 책을 옮겨 나란히 내놓은 이는 폴라니 전문가 홍기빈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이다. ‘거대한 전환’의 역자이기도 한 그는 “90년대 이후 전 세계에 확산된 자기조정 시장에 대한 가히 종교적인 믿음이 불평등, 실업, 저성장, 공동체파괴, 환경파괴를 야기했다”며 “인간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 서비스, 심지어는 사회적 관계까지도 상품으로 만들 경우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질서가 수립될 것이라는 신념을 가장 명쾌하게 반박해온 것은 폴라니”라고 말했다.

홍기빈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은 “경제를 돈 계산이라고만 보지 말고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의 풍요로 볼 때 다원적 모델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홍기빈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은 “경제를 돈 계산이라고만 보지 말고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의 풍요로 볼 때 다원적 모델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홍 위원장은 “특히 한국의 경우 시장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시작된 것이 신자유주의 유입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며 “60년대부터 교육, 주택 등 무엇이건 경제와 연결될 수 있게 뜯어 고치고, 그 이외의 가치는 인정하지 않아온 시기가 여타 국가에 비해서도 오래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과연 이대로 사회가 경제에 종속되는 것이 옳으냐는 지적에 대해 ‘오히려 경제가 사회를 살찌우는 수단이 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폴라니의 관점”이라며 “반세기 이상 사회전체를 경제에 복속시킨 한국사회의 입장에서는 이런 폴라니의 사상이 특히 적실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2008년 이후 시장에 대한 회의가 팽배했지만 여전히 경제를 살리려면 세금을 깎아야 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해야 하고, 기업이 활동하기 좋게 해줘야 한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지 않냐”며 “인간이 철저하게 이기적 동기로만 움직인다는 틀에서 벗어나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가 삶을 풍요하게 하는 것’이 곧 ‘경제’라는 게 폴라니식 사고”라고 강조했다.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에 대해 그는 “공산주의식 계획경제나 자본주의식 시장경제가 폴라니 입장에서는 모두 황당한 이야기”라며 “여러 요소의 조화를 통해 개개인에게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물적 자원을 조달하는 궁극적인 경제의 목적을 수행한 다호메이의 사례를 통해 다원적 모델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 경제 역시 폴라니를 통해 반드시 어떤 이념과 방법으로 사태를 풀자고 우겨대지 말고 복지는 복지대로 기업 부문은 기업부문 대로 어떤 식으로 질서를 짜는 것이 가장 현명할지 다원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24일 서울 은평구에 문을 여는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는 연구소 아시아지부로서 서울을 기반으로 한 대안적 경제모델을 연구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착한책가게ㆍ422쪽ㆍ2만4,000원
착한책가게ㆍ422쪽ㆍ2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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