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케이트 밀렛
급진주의(Radical)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제2의 물결’ 의 도드라진 파도로 60년대 말 70년대 초 미국 사회를 휩쓸었다. 67년 벨러리 솔래너스의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Society for Cutting Up Men Manifesto)’이 거리에 등장했고, ‘뉴욕의 급진여성들(NYRW)’이 그 해 출범했다. 69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그룹 ‘WITCH’와 또 다른 급진그룹 ‘레드 스타킹스’가 NYRW에서 분화했다. 그 파도는 66년 설립된 전미여성협회(NOW)의 직장 성차별 철폐 등 제도 개선에 치중하는 온건노선에 반발해 융기했지만, 근본 동인은 남성 중심 흑인 민권ㆍ반전 운동에 대한 환멸이었다. 그 급진 페미니즘 안에서 또 하나의 분수령을 형성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선언(‘The Woman Identified Woman’)이 70년 나왔다.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 소외되고, 심지어 경계 대상으로 밀쳐지던 레즈비언 그룹은, 저 선언문 이름처럼, 남성과의 관계규정에 종속되지 않는 여성의 선명성을 표방하며 2세대 페미니즘에 의미를 더했다.
컬럼비아 대 영문학과 35세 대학원생 케이트 밀렛(Katherine “Kate” Murray Millet)이 논문 ‘성 정치학(Sexual Politics)’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해가 1969년, 저 소용돌이의 한 복판이었다. 이듬해 7월 출간된 책은 시사주간지 ‘Time’이 8월 31일자 여성운동 특집호 표지로 밀렛의 초상화를 실을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뉴욕타임스는 그를 “페미니스트들의 제사장(high priestess)”이라 소개했다. 서평의 압권은 ‘Time’이 인용한 밀렛의 논문 지도교수 중 한 명인 조지 스테이드(George Stade)의 말이었다. “호두까기 집게에 불알을 물린 기분으로 이 책을 읽게 될 것이다.”(cnn.com, 2015.7.22)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이자 2세대 정전(正典), 페미니스트 문학비평의 첫 장을 연 책으로 꼽히는 ‘성 정치학’의 저자 케이트 밀렛이 9월 6일 별세했다. 향년 82세.
‘성 정치학’은 가부장권력(patrichal power)에 초점을 맞춘 젠더 정치철학서이기도 했다. 그는 당대 성 해방의 기수로 떠받들리던 금서(禁書) 작가 헨리 밀러의 문제작 ‘섹서스(Sexus)’를 겨냥해 포문을 열었다. 거부하기 힘든 성적 매력과 능력을 지닌 남자 주인공이 섹스를 갈망하지만 순종적인 친구 부인을 농락하고, 소문을 들은 남편이 다시 부인을 가학적으로 유린하는 이야기. 밀렛의 비평 안에서, 밀러의 분신이라 할 만한 ‘섹서스’의 주인공은 제 남성적 위력에 도취된 나르키소스이자 음란한 여인을 벌준 가부장적 판관이고, ‘창녀 기질’의 부인은 응당한 벌을 받는 죄인이다. 밀렛은 주인공의 내면과 섹스 행위의 장면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컨)텍스트에 도사린 성의 권력관계를 폭로한다. 밀렛에 따르면, 그 섹스는 남성의 여성 지배ㆍ소유 권력 행위와 본질적으로 하나다. “밀러의 교육적 의도는 명백하다. 불감증을 가진 여성들, 즉 성적으로 고분고분하지 못한 여성들은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의 정절이라는 법칙을 어긴 여성들도 맞아야 한다.” (…더 중요한 점은) 밀러의 성적ㆍ문학적 모티프와 그 모티프에 명백하게 함축되어 있는 사디즘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밀러의 모티프는 여성 침실의 정치학(성의 대리정치)이기보다는 투계장의 정치학에 가깝다. 그러나 때로 후자는 전자를 해명하는 데 상당한 빛을 던져준다.”(‘성 정치학’ 김전유경 옮김, 이후)
밀렛은 문학뿐 아니라 에덴 동산의 이브에서부터 프로이트의 ‘남근선호’, 당대 기능주의 철학과 인류학, 심리학, 정치ㆍ경제학, 법ㆍ의학, 교육학 등 곳곳에 내장된 젠더정치의 장치와 권력 메커니즘을 해부하고 폭로했다. 그 거시 권력의 뿌리를 그는 가정(가족관계)에서 찾았다. “가장은 가부장권력 안의 가부장권력으로서, 거대 사회의 거울이자 연결고리이다.” 책 3부에서 그는 당대의 문학권력이었을 D.H 로렌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의 대표작 비평, 즉 문학이 묘사하는 이성애 관계 안에서 여성이 어떻게 수동적 순종적 존재로 대상화되며 ‘내면적으로 식민화’되는지에 집중했다. 그는 2000년 판 서문에 “나는 가부장제를 지위와 기질 성역할에 근거한 지배적인 정치제도로, 사회적으로 조건 지어진 믿음의 체계로 간주하려 했다. 이 체계는 스스로를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한다”고 썼다.
가장 미시적인 침실 풍경에서부터 현대 사회 젠더 정치의 구조에까지 거침없이 나아간 그의 저작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 2세대 슬로건의 이론적ㆍ철학적 뼈대가 됐다. ‘성 정치학’은 출간 2주 만에 1만 부가 매진되는 등 연말까지 8만 부가 팔렸고,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동갑인 밀렛은 가장 뜨거운 이론가 겸 리더로 급부상했다.
그가 양성애자라는 사실이 ‘아웃팅’된 것도 그 해 12월 ‘Time’을 통해서였다. “그 사실은 여성운동 대변자로서의 그의 명분과 이론을 불신하게 하고, 페미니스트들이 실은 동성애자(남성 혐오주의자)라고 폄하하는 이들의 입장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guardian) NOW 의장 베티 프리던이 ‘라벤더 위협 Lavender Menace’, 즉 레즈비언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한 게 불과 한 해 전인 69년 11월이었다. 여성운동의 온건ㆍ급진 불화를 봉합하기 위해 NOW가 주도해 조직한 ‘여성연대의회(Congress of Unite Women) 1차 회의 단상에서 그는 레즈비언의 ‘남성혐오 성향’이 페미니즘 운동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이듬해 5월 뉴욕서 열린 연대의회 2차 회의장 단상을 점거하고 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선언문을 뿌렸다. 그들에게 ‘Menace’는 ‘힘’이었다.
밀렛의 성 정체성이 폭로된 시점이 그렇게 민감했다. 밀렛은 “당당하지 못했다(not go far enough)”는 이유로 레즈비언 진영으로부터 비판 받았고, “너무 나갔다(went too far)”는 이유로 온건 진영으로부터 배척 당했다.(katemillett.com) 언론과 주류 문단, 비평가들의 비난도 물론 거셌다. 저명한 비평가 어빙 하우(Irving Howe)는 잡지 ‘하퍼스’ 글에서 “(밀렛의 책은) 소위 시대정신의 파편들을 짜깁기해둔 데 불과하며, 언뜻 대단해 보이지만 단순한 것들을 끌어 모아 배운 티를 조잡하게 과시한 책일 뿐”이라며 “읽다 보면 그 책이 여장 남자(female impersonantor)에 의해 쓰여졌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썼다.(NYT) 밀렛에 의해 “남성성이 훼손당할까 봐 한시도 마음 편할 날 없는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로 ‘불알’을 물렸던 노먼 메일러는 71년 에세이 ‘섹스의 죄수들 The Prisoner of Sex’에서 밀렛을 “새로운 형태의 내숭으로 무장한 여성 폭력배(the Battling Annie of some new prudery)’라 썼다.(LA Times) 밀렛이 패널로 참석한 컬럼비아 대 여성운동 컨퍼런스에서 한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일어서서 “당신 정말 동성애자인가요? 대답해요!”라며 고함 친 게 Time 보도 직전이었다. 밀렛은 74년 자전에세이 ‘The Fly’에서, 500여 명의 청중이 숨소리마저 죽인 채 자신을 응시하던 그날 그 순간의 풍경을 묘사한 뒤 이렇게 썼다. “나는 그 질문의 의도를 알았다. 파시스트의 칙령처럼 그들에게 양성애는 비겁한 변명일 뿐이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레즈비언이다’라고 말했다.”(LA Times)
만성적인 양극성 장애(조울증)를 앓던 밀렛은 73년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된 것을 시작으로 두 차례 장기 입원을 했고, 80년대 중반까지 약 13년간 리튬을 복용했다. 병동에서 폐소공포증까지 얻은 그는 평생 반(反)정신의학주의자로 살았고, 정신병원에 감금된 뒤 살해당한 한 소녀의 실화를 바탕으로 ‘The Basement(79)’와 자신의 체험 에세이 ‘The Loony-Bin Trip’(90)을 쓰기도 했다.
케이트 밀렛은 1934년 9월 14일 미국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서 3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 엔지니어로, 가정폭력을 일삼던 알코올 중독자였다. 밀렛이 14살 되던 해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농부의 딸인 어머니는 교사와 보험 판매원 등으로 일하며 세 자매를 키웠다. 어머니의 하소연과 원망, 눈물바람을 감당해야 했던 고교생 밀렛은 어머니가 자살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내가 차 문을 대신 열어주고 눈길을 걸을 때 부축해주어야 하는 어머니의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Flying’에 썼다.(마르시아 코헨 저 ‘The Sisterhood’)
밀렛이 10대를 보낸 40년대 중후반은 ‘리벳공 로지’들이 가정으로, 다시 말해 전통적인 성 역할로 복귀하던 때였다. 전장에서 돌아온 남편과 애인에게 그들이 지키려던 ‘미국적 가치’ 즉 전장에서 꿈꾸던 ‘따뜻한 가정’을 제공하는 일이 국가ㆍ사회적 과업이었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밀렛의 고향 세인트폴은, 공립학교에 진학하면 타락하는 줄 알던 보수 가톨릭 정조의 섬 같은 곳이었다. 반항적 ‘톰보이’ 기질의 밀렛은 그 무렵부터 5년 연상 언니(Sally)의 영향 등을 받으며 젠더에 눈 뜨기 시작했고 52년 미네소타대 영문과에 진학해서는 친구들에게 “여성은 가족을 돌보는 데서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게 어디서 나온 말이야? 여성은 태생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가정은 어디서 비롯된 거야?”같은 말을 하곤 했고, 친구들은 “너 공산당원이냐”며 묻거나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르시아 코헨에 따르면 “메카시즘의 시대에는 미국 사회가 이상이라고 여긴 것을 부정하는 모든 시도를 미국적인 것에 대한 위협이었다. 당연히 성적인 것도 포함됐다”고 썼다.
밀렛은 부자 고모의 도움으로 영국 옥스퍼드대 세이트 힐다(St. Hilda) 칼리지 대학원에 진학했고, 2년 만에 미국 유학생으론 최초로 우등 졸업했다. 고모가 학비를 대주며 달았다는 조건은, 동성애 포기설과 고분고분해져라는 설로 엇갈린다. 둘 다였을 수도 있지만 그는 두 조건 모두 충족시키지 못했다. 58년 귀국하던 무렵 그는 고모와 척이 진 상태였다. 그는 뉴욕의 우범지역이던 보웨리에 거처를 정했다.
그의 꿈은 조각가였다. 6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며 조각 공부와 작업을 병행했고, 거기서 만난 조각가 후미오 요시무라(Fumio Yoshomura)와 63년 귀국, 2년 뒤 결혼했다. 그의 보웨리 집에는 성을 바꾸지 않은 두 사람의 문패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는 65년 인종평등위원회(CORE)에 가입, 흑인인권 및 반전운동에 가담했고, 66년 전미여성협회 창립멤버이자 교육분과 의장으로 활동했다. 그가 미국 각급학교의 교육 커리큘럼 등을 분석해 성차별적 교육 실태를 고발한 68년 보고서 ‘Token Learning’은 이후 국내외 젠더 교육학 연구 및 현장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부를 더 하자고 마음 먹은 것도 그 일을 하면서였다. 그는 68년 컬럼비아대 박사과정에 진학, 몇몇 대학서 강의를 하면서 논문을 준비했다. 그해 5월 컬럼비아대학 교직원이 국가의 학내 사찰에 반발해 파업을 시작했고, 그는 12월 학내 시위와 조직활동을 벌인 것이 빌미가 돼 강사로 일하던 바나드(Barnard) 칼리지에서 해고 당했다. 그 분노와 실의 속에 쓴 게 논문 ‘성 정치학’이었다.
함께 운동 현장을 누비면서 저널리스트로, 학자이자 교수로 사회적 지위를 누리던 2세대 리더들과 달리 밀렛은 숨질 때까지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성 지향과 정신병 이력도 원인이었겠지만, 그의 성격도 주변과 잘 융화하는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랜 친구인 페미니스트 엘리노어 팸(Eleanor Pam)에 따르면 그는 낯가림이 무척 심했지만 변덕스럽고 괴팍한 면도 있어서 거칠고 직설적인 말로 지인들에게 상처 주는 일이 잦았다. 살림에도 썩 능한 편이 아니었다. 그는 책 인세와 강연 수입으로 세 여성의 각기 다르면서 같은 삶을 조명한 71년 다큐멘터리 ‘Three Lives’를 찍었고, 성노동 보고서를 쓰면서 취재원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바람에 세금을 못내 곤란을 겪기도 했다. 수입 일부로 70년대 초 뉴욕주 북부 포킵시(Poughkeepsie)에 10에이커의 땅을 사둔 게 그로선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보웨리와 포킵시 농장을 오가며, 훗날 결혼한 캐나다 출신 포토저널리스트 소피 케어(Sophie Keir)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꿔 팔았고, 책을 썼고, 그렇게 번 돈과 책 인세로 땅 한 켠에 여성 예술인 공동체마을을 운영했다. 시몬 느 베이유 같은 친구들이 그 숲에 찾아와 1년씩 머물다 가기도 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훗날 땅 일부를 팔아야 했고, 2012년 예술인 마을을 ‘예술가를 위한 밀렛센터’로 이름을 바꿔 비영리 법인화했다. 대학 같은 곳에 안정적인 직장을 잡아보려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는 자주 실의에 젖었고, 옛 동료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이따금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페미니즘 운동은 70년대 중반 이후, 급진 동력을 잃어가던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문화 페미니즘으로 선회했다. 그들은 가부장 권력에 적극적으로 맞서기보다 여성적 ‘반문화 공간’개척에 주력했다. 그 공간은 “일종의 능동적 저항의 문화로 상상됐지만, 에이드리언 리치의 지적처럼, (…가부장권력을) 회피하기 위한 ‘그것 자체가 목적인 이주의 장소’가 됐다.(…) 사회 변혁보다는 개인 변혁으로 초점이 맞춰졌다.”(한우리, 이화여성주의학회 강연)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2세대의 이념은 그렇게 변색됐다.
밀렛은 서서히 잊혔고, 90년대 들면서 ‘성 정치학’을 비롯 그의 대다수 “과격하고 급진적인” 책들도 절판됐다. 로빈 모건(Robin Morgan)과 점심식사를 하며 페미니즘 권장도서 목록에조차 자신들의 책이 포함되지 않는 현실을 탄식했다는 게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밀렛에게 그건 명예나 대의의 문제 이전에 생계의 문제였다.
98년 밀렛은 가디언에 ‘The Feminist Time Forgot’이란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나는 내가 이룬 것들을 잘 팔아먹을 재주도 없고, 취업할 능력도 없다. 나는 미래가 두렵다. 모아둔 돈 다 쓰고 난 뒤 닥쳐올 가난이, 감당해야 할 굴욕이, 어쩌면 노숙자의 삶이 겁이 난다.” 그 무렵의 그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베티 프리던과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등을 언급하며 “그들은 모두 뛰어난 정치인들이지만, 나는 아니다. ‘여성해방의 케이트 밀렛’도 아니다”라며 냉소하던 때의 그와 달랐다.(advocate.com)
2000년 ‘성 정치학’등 그의 책들이 복간된 것은 그의 저 칼럼 덕이 아니라 90년대 말, 2000년대 초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intersectional feminism’의 새로운 문제의식이 부각된 결과일 것이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는 다양하고 복합적이므로 개별적인 것들을 교차시키며 파악해야 한다는 교차성 페미니즘은 밀렛의 ‘성 정치학’과 레즈비언 페미니즘, 흑인 페미니즘 등 2세대 하위 진영을 활발히 재조명했다. 걸출한 페미니스트들의 밀렛에 대한 헌사도 대부분 그 무렵 쏟아졌다.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 “케이트 밀렛이 책 한 권으로 이룬 것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이를 나는 알지 못한다.”(Guardian)
매기 도허티 “밀렛의 작업은 정치적 행위와 문화적 표현이 서로 스미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성 혁명과 우리가 사는 이 사막을 견딜 만한 세상으로 바꾸기 위한 투쟁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도 그였다.”(NYT)
-체슬러(Chesler) “밀렛은 자유의 가능성, 그 자유의 절박성, 여성이 감당해 온 끔찍한 현실에 눈뜨게 해주었다.”(워싱턴포스트)
캐롤 애덤스(Carol j. Adams) “63년 배티 프리댄이 ‘여성의 신비’라고 지적한 문제에 ‘성 정치학’이란 이름을 부여하고 ‘가부장 권력’이라는 원인을 규명한 이가 밀렛이었다.”(NYT)
밀렛은 2012년 성소수자 문학단체인 람브다 문학재단(Lambda Literary Foundation)의 ‘개척자상(Pioneer Award)과 오랜 친구인 오노 요코가 제정한 ‘용기있는 예술인 상’을 탔고, 이듬해 미국 여성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수락 연설에서 밀렛은 활동가 시절의 행복과 참여의 기쁨, 시대의 전위에서 그 시대의 일부가 되는 삶의 흥분을 회고한 뒤, 젠더 정치의 불의에 끊임없이 맞서자고 촉구했다. “살면서 일상의 불만을 표출하듯, 거리에서, 연인에게, 또 친구에게 항의의 목소리를 내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얼굴이 여성의 얼굴이 돼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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