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36.5] '대통령 어록'으로 읽은 최순실 게이트

입력
2016.11.22 04:40
0 0
박근혜 대통령이 올 1월13일 청와대에서 새해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두 손을 머리 쪽으로 들어 올린 것은 법안 통과에 미적대는 국회를 성토하는 제스처였다.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박근혜 대통령이 올 1월13일 청와대에서 새해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두 손을 머리 쪽으로 들어 올린 것은 법안 통과에 미적대는 국회를 성토하는 제스처였다.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1.“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다 같이 도와준다.” ‘박근혜 어록’ 중 최고 히트작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보니, 우주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만 열심히 도와준 것 같다.

우주의 기운을 믿은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이 되자, 최씨 패밀리 비즈니스가 술술 풀렸다. 최씨는 비선 대통령이 됐고, 딸 유라는 이화여대생이 됐고, 조카 시호는 체육계를 주무르는 거물이 됐다. 우주는 유라 친구 아버지의 민원까지 들어주었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박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이 완벽하게 실현됐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최씨 비리의 공범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역사 교과서의 어디가 잘못됐느냐는 질문에 박 대통령은 “전체 책을 보면 다 그런 기운이 온다”고 했던가. 최씨 공소장을 보면 국민도 어쩐지 청와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그런 기운이 온다.

#2. “세월호에 탄 아이들이 다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드냐”는 엉뚱한 질문만큼,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여성의 고단한 삶을 전혀 몰랐다. 철벽 같은 유리천장을 깨는 데 “솔선을 수범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 되겠다더니, 임기 3년9개월 동안 국무위원과 청와대 수석으로 기용한 여성은 겨우 다섯 명이었다.

그런 박 대통령이 얼마 전 “여성 대통령의 사생활을 존중해 달라”(유영하 변호사)면서 ‘연약한 여자’의 가면 뒤에 숨었다. 대통령 박근혜와 여성 박근혜를 헷갈리게 하려는 잔꾀였다. 여성이 결정적인 순간에 보호받아야 하는 비겁한 존재라면, 공적 책임을 맡을 자격이 없다.

최고 권력자의 부끄러운 ‘젠더 팔이’를 수습하는 것은 “역시 여자는 안돼”라는 조롱을 듣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차별에도 특별대우에도 반대하는 ‘진짜 여성들’의 몫이 됐다. “참 나쁜 여성 대통령”은 ‘대박’이 아닌 ‘쪽박’이었다.

#3. 박 대통령은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하다”고 했다. 유체이탈 화법 번역기를 돌리면 이런 뜻일 터. ‘국민 먹여 살리려고 밤낮 없이 애쓴 것이, 외로워서 친구를 믿고 조언을 조금 들은 것이, 기업의 순수한 지원을 받은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 감히 대통령에게 나가라 말라 하다니!’

그런 박 대통령을 취재하는 나는 요즘 이러려고 기자가 됐나 자괴감이 들어 몹시 괴롭다. “여러분이 이러려고 저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셨나 자괴감이 드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박 대통령은 국민 앞에 다시 서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무너진 민주주의를, 상처 받은 국민의 혼을 정상으로 돌려 놓을 마지막 책임이 박 대통령에게 있다.

#4. 박 대통령은 늘 정신력을 중시했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진돗개 정신으로” 부정부패를 척결하라고 다그쳤고, “마음이 하나가 되면 무쇠도 끊을 힘이 생긴다”며 평화통일도 의지력으로 이루자고 역설했다.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는, 정신수련 교본 같은 제목의 자서전도 썼다.

박 대통령의 최근 행보는 그야말로 정신력의 승리다. 실체가 불분명한 ‘샤이 박근혜(숨은 지지층)’의 존재를 믿는 정신력, 청와대 민원실에 격려 전화를 한다는 5%의 민심에서 국정 복귀의 정당성을 읽어내는 정신력, 검찰 조사를 받겠다는 약속을 뒤집고 “차라리 법대로 탄핵하라”고 맞서는 정신력.

#5. “대전은요?” 한 마디로 선거 판세를 흔들었던 박 대통령은 더 이상 ‘선거의 여왕’이 아니다. ‘버티기의 여왕’은 요즘 토요일 밤마다 청와대 관저에 칩거하며 “촛불은요?”라고 참모들에게 묻지 않을까. 박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책임은요?”“시인은요?”“반성은요?” 그리고 더 많은 국민이 묻는다. “하야는요?”

최문선 정치부 차장 moonsu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