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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점 중국도자기 속 고려청자 7점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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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점 중국도자기 속 고려청자 7점의 비밀

입력
2016.08.3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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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해저선에서 발견된 고려청자 7점이 중국에서 출항 시 고급 중국제 도자기로 인식돼 실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안해저선에서 발견된 고려청자 7점이 중국에서 출항 시 고급 중국제 도자기로 인식돼 실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323년 중국 닝보(당시 경원ㆍ慶元)에서 출항해 후쿠오카(당시 하카타ㆍ 博多)로 향하던 중 전남 신안 증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신안해저선은 1975년 한 어부가 우연히 도자기를 건져 올린 것을 시작으로 65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14세기 최대의 무역선 신안선이 쏟아낸 2만 4,000여 점 유물 중 2만 점은 중국 각지에서 제작된 도자기였다. 그런데 당시 최상의 상품이었던 수많은 중국도자 사이에서 7점의 고려청자가 발견됐다. 중국 배에 왜 고려청자가 실렸던 것일까.

신안해저선 발굴 40주년을 기념하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의 일환으로 2일 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신안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고바야시 히토시(小林仁)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날 ‘중국에서 출토된 고려청자-신안선에서 발견된 고려청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라는 발표에서 이 고려청자가 중국도자로 잘못 알고 실은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학계에서는 고려청자가 중국에서부터 실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 왔다. 만약 도자 선적을 위해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고려에 들렀더라면 고작 7개만 싣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인양 당시 고려청자가 선창(船倉ㆍ갑판 아래 창고) 아래쪽에 있었다는 점도 일찌감치 배에 실렸다는 근거로 제시된다. 남송에서 원에 이르기까지 항저우에서 골동 시장이 성행했다는 점을 들어 신안선의 고려청자 역시 그때 오가던 자기 중 하나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중국에서 고려청자가 선적돼도 이상할 게 없다는 얘기다.

고바야시 연구사는 배의 최종 목적지였던 일본 역시 고려청자를 ‘고려청자’로서 인식하고 수용했다기보다는 ‘가라모노’(唐物ㆍ중국으로부터 전해진 문물)로 알고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당시 일본이 구체적으로 ‘고려청자’를 요청했는지, 혹은 일본에서 고려청자를 ‘고려청자’로 알고 들였는지 증명할 기록이 없는데다 2만여 중국제 도자기 속 7점은 우연이라는 심증을 둘 수밖에 없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비록 일본인들이 가라모노로 알고 고려청자를 즐겼다 할지라도 이것이 “결코 고려청자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 중국 도자기와 헷갈려 선적됐다 해도 이는 “송 문화와도 통하면서 그에 필적하거나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를 능가하는 청자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고려청자의 진면목으로 평가해야 할 점”이라고 덧붙인다. 실제로 고려청자는 송대의 명품을 정리한 책 ‘수중금(袖中錦)’에 청자 중 유일하게 언급됐을 정도로 당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신안선의 길 ’‘신안선의 교역품’ ‘신안선과 고려’를 주제로 진행된다. 친다수(秦大樹) 중국 베이징대 교수는 원대 해상무역과 신안선에 관해 이야기하고, 모리 다쓰야(森達也) 일본 오키나와현립예술대학 교수와 고이케 도미오(小池富雄) 일본 쓰루미대 교수는 각각 신안선의 중국 도자기와 칠기를 논한다. 이어 김영원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신안선 자기와 고려 유적에서 출토된 원대 자기를 비교한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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