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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올을 든 여성혐오

입력
2016.04.1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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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 비판을 받고 있는 이완 작가의 합성 사진 작품 '한국여자'. 연합뉴스
여성혐오 비판을 받고 있는 이완 작가의 합성 사진 작품 '한국여자'. 연합뉴스

10일 오후, 서울 청담동 하우스 오브 디올. 화제의 사진 작품 ‘한국여자’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룸비 무료 소주방이 늘어선 향락의 거리에 어깨를 드러낸 젊은 여성이 하이패션 브랜드 디올의 가방을 들고 서 있는 합성 사진으로, 이완(37) 작가의 작품이다. 성 상품의 공급과 그 결과로서의 ‘명품백’이라는, 오래된 한국식 여성혐오의 구조를 강하게 환기시키는 이 사진은 이미 격렬한 비판을 받으며 소셜 미디어를 강타한 바 있다. ‘유흥가에서 번 돈으로 ‘명품백’ 산 젊은 여성’이라는 시지각적 반응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작품인데 직접 보고 난 후 판단하는 게 옳겠다 싶었다.

하지만 디올 가방을 모티프로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만든 27점의 작품들 속에 ‘한국여자’는 없었다. 논란이 일자 슬그머니 내린 듯한 모양이었다. 그 작품이 없는 이유를 묻자 전시 도슨트는 “모르겠다”며 난처해 했고, 디올 홍보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작가 역시 생각을 정리 중이라며 통화를 원치 않았다. ‘명품백’ 들고 선 야한 옷차림의 여자를 ‘한국여자’의 초상으로 그려낸 작가나, 기표가 가리키는 기의가 무엇인지 파악하지도 못한 채 아티스트와의 컬래버레이션에만 열성적인 브랜드나, 책임 있는 자세는 아니었다.

2월 23일 개막한 이 전시는 디올이 자사의 시그니처 상품인 ‘레이디 디올’ 가방을 테마로 한 다양한 미술작품을 선보이는 ‘레이디 디올 애즈 신 바이(Lady Dior As Seen By)’의 서울 전시다. 디올이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아티스트들에게 의뢰해 제작한 100여점의 ‘레이디 디올’ 작품 중 일부를 선보이는 순회전으로, 서울 전시를 기념해 이완, 최정화, 황란 등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추가됐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2014년 유망한 젊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제정한 아트 스펙트럼 작가상의 첫 수상자로 화려하게 이름을 알리며 주목 받기 시작한 이완 작가는 포스트 민중미술 계열로 분류된다. 동남아시아 국가에 머물며 설탕이나 비단, 금 등을 직접 생산하는 노동의 과정과 결과물을 직접 영상에 담거나 황학동 벼룩시장에 가격표를 달고 앉아 있는 불상을 촬영한 사진 작업 등을 선보여 왔다.

작가가 견지해왔던 동아시아의 근대화에 대한 사회의식이 소비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있는 럭셔리 브랜드와의 협업이라는 작업조건 자체와 불화를 빚은 것일까. 전시 오픈에 맞춰 유튜브에 공개한 홍보 동영상에서 작가는 ‘한국여자’를 “크리스찬 디올의 제품은 효율성 위주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는 다른데 이런 것들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을지, 한국에서 어떤 의미로 소비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이 전부 평등하고 공정한 상태라면 레이디 디올은 이런 공정함과 평등함을 깨는 요소”라고도 말했다.

잡다한 것이 뒤섞여 의미가 명쾌하지 않은 저 설명들은 일단 상호 모순된다. “효율성 위주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는 다르다”는 말은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만들어 공장의 대량제조 시스템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명품’이라는 럭셔리 브랜드들의 홍보 문구를 그대로 반복한 것 같고, 개당 가격이 500만원에 육박하니 레이디 디올이 “공정함과 평등함을 깨는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장인들의 반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라는 호감과 공정함과 평등함을 깨는 데 대한 반감이 상호 충돌하는 가운데 애먼 ‘된장녀’와 ‘김치녀’가 편리하게 소환된다. 근본적으로 브랜드의 홍보 캠페인 성격을 띠는 이런 전시에서 작가의 사회성을 구출할 수 있는 방편으로 여성혐오가 채택된 것이다.

럭셔리 브랜드들의 마케팅 전략은 최근 몇 년 사이 미술관 전시와 아티스트 협업으로 중심축이 이동했다. 자신들의 상품에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경질 원인으로 까르띠에, 루이비통, 에르메스 등 프랑스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의 박물관 전시 거부가 거론됐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한국에서는 2014년 여름 샤넬이 가브리엘 샤넬의 일생을 회고하는 ‘장소의 정신’전을 열었고, 루이 비통은 지난해 5월부터 수석 디자이너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컬렉션을 준비하며 받은 영감을 주제로 한 ‘루이 비통 시리즈’ 전시를 개최했다. 디올도 지난해 여름 크리스찬 디올의 아카이브를 추려 시대별 대표 의상을 선보인 대규모 전시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었다. 누구에게나 공짜로 열려 있고, 누구나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릴 수 있는 이런 전시들은 예술 작품의 공공재적 위상을 흉내 내며 더 넓게 제품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브랜드 전략이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이런 전시에는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고급 가방을 소재로 의미와 감동을 주기야 어렵겠지만,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재미와 흥미라는 예술의 또 다른 기능을 충족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정직하고 공정해야 한다.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비판하면서 그럴 수는 있어도, 자본주의 소비상품을 홍보하면서 그럴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비판에 성별 구분이 있을 수는 더더욱 없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잇따랐던 진보적 지식인들의 여성혐오가 이번에는 운동권 미술작가의 작품으로 드러난 것”이라며 “문제는 구조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정작 주변의 약자에게는 둔감하고 폭력적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개그와 힙합, 드라마와 영화, 소설과 미술작품.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도처에서 지뢰처럼 터지는 유사 사건들은 이제 예술가에게도 시민의 상식을 물어야 할만큼 만연한 여성혐오의 현실을 증명한다.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이전에 여성혐오부터 극복해야 한다. 시민이 먼저이고 예술가는 그 다음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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