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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21> 해설만큼 익숙한 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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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21> 해설만큼 익숙한 주례

입력
2011.02.13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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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말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나면 연말까지 두 달간 야구인들은 '방학'을 맞는다. 2006년부터 3년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을 지냈던 나로서는 연말이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다.

하지만 막상 연말이 되면 그렇지도 않다. 나는 방학 때가 되면 오히려 더 바빠진다. 주례 때문이다. 연말에 결혼을 하는 야구선수들 중 일부는 내게 주례를 부탁했고, 또 지금도 부탁하고 있다. 대충 세봐도 내가 주례를 선 횟수만도 300차례 가까이 되는 것 같다. 언제 그 많은 주례를 다 섰는지 정말 놀랍다. 나는 주례 부탁이 들어오면 웬만하면 거절하지 못한다.

결혼식의 주례라는 게 존경하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게 마련이고, 그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내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최초로 주례를 서준 사람은 서울 환일고등학교 체육교사 시절의 남자 제자였다. 이세진이라고 학창시절에 말썽깨나 부리던 친구인데 "나중에 내가 주례 서주마"라고 했던 농담이 현실이 됐다.

결혼 날짜를 잡은 뒤 이세진은 내게 정중히 주례를 부탁했다. 그때 내가 36세였는데 노총각 같으면 장가갈 나이였다. 36세의 주례는 정말 드문 일이다.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런데 이세진은 "약속을 지키세요" "선생님을 정말 존경합니다"라며 막무가내로 버텼다. 나를 존경한다는데 거절하기 쉽지 않았다.

나는 결혼 전에 제자와 함께 예비신부를 만났다. 예비신부는 내가 신랑의 스승이고, 야구해설가라고 하니 나이가 지긋한 중년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나자 '이 사람이 스승이야, 동네 형이야.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하는 눈치였다. 아무튼 그렇게 내 인생 첫 주례를 섰다.

두 번째로 주례를 선 사람은 야구선수였다. 당시 쌍방울에 있던 손인호였다.(현재 LG에 있는 손인호가 아님) 그때도 내 나이는 마흔둘밖에 안 됐다. 여전히 주례를 서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다. 하지만 나는 '서른여섯에도 했는데 그래도 이젠 마흔을 넘겼잖아'라고 생각하고 흔쾌히 승낙했다.

그 후로도 1년에 몇 차례씩 주례를 섰다. 거의 매달 한 번씩 주례를 서며 1년에 10번 이상을 기록하기도 했다. 주례를 부탁한 사람들은 대부분 제자들이거나 야구선수들이었지만 특별한 경우도 있었다.

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씨 아들의 주례를 선 적이 있다. 그때까지 나는 전경환씨와 일면식도 없었는데 "사회적으로 알려져 있고 무게가 있는 분을 모신다"는 말에 그만 솔깃하고 말았다. 솔직히 나는 귀가 얇은 편이다. 나를 칭찬하는 말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다.

재미있는 사실은 야구선수들 중 상당수는 연상과 결혼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근거는 없지만 내 생각엔 야구선수가 늘 승부에 지쳐 있고, 그러다 보니 연상의 여성에게서 편안함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맡은 주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결혼한 지 3년 만에 뒤늦게, 그것도 야구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커플이다. 한 이벤트 업체가 주선하고 프로야구 LG가 후원하는 형식으로 치러진 이 결혼식은 사상 최초로 마운드에서 진행됐고, 나는 자청해서 주례를 맡았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주례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라운드에서 선 나는 마이크를 잡고 "이제 두 사람은 한 팀이 됐으니 9회 말까지 행복하게 잘 사세요"라고 힘차게 말했다. 결혼을 야구에 빗댔으니 얼마자 적절한 비유인가.

지금까지 오랜 경험에 의하면 주례사는 짧을수록 좋다. 솔직히 2~3분이면 족하다. 최대 5분을 넘지 않아야 하객들의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분위기에 따라 어떤 때는 주례사를 1분만에 끝내기도 한다.

주례를 300번 가까이 서다 보니 노하우도 풍부하다. 내 머릿속에는 주례사의 기본 패턴들이 잘 정리돼 있다. 미리 주례사를 준비할 것도 없이 결혼식으로 가는 차 안에서 신랑, 신부의 이름 등 몇 가지만 정리해 뒀다가 '생방송'을 한다.

몇 년 전의 일이다. 현대 소속 선수들이 며칠 간격으로 잇달아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들도 대부분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나는 주례사를 조금씩 다르게 하기 위해 진땀깨나 흘려야 했다.

나는 요즘 주례사에서는 희생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결혼생활에서 희생이라는 것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한다. 대신 책임감이라는 말을 잘 쓴다. 평생 연애감정으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부부간에는 책임감이 중요하다.

책임감이란 단순히 의무가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운명으로 인식하는 마음, 배우자에게 빚지고 산다는 마음이 책임감이다. 부부는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파트너이자 친구다. 친구간에는 서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게 도리다.

나이가 들수록 주례 부탁도 늘어간다. 오지랖 넓고, 남의 부탁 잘 거절하지 못하는 나는 앞으로도 어지간하면 주례를 서줄 것이다. 솔직히 주례는 아무한테나 부탁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나도 세상을 잘못 산 것 같지만은 않다. 주례 부탁을 받는 것은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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