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생을 야구와 연을 맺고 살아 왔다. 선수생활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가 전부였고, 대부분의 세월을 방송 해설자로 보냈다. 환갑을 넘긴 내 인생에서 야구가 차지한 세월은 50년이나 된다.
내가 해설자로 살아 오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야구의 매력은 무엇입니까"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한마디로 역전입니다"라고 답했다. 9회 말 투 아웃이 되면 경기 종료까지는 아웃카운트가 1개만 남는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0.4~0.5초면 포수의 미트에 꽂힌다. 3시간 넘게 진행되던 승부가 잠시 후 끝난다.
성급한 관중은 이미 자리를 뜨기 시작한다. 하지만 잘 맞은 타구 하나가 담장을 넘어가면 모든 것은 원점으로 되돌아가거나, 승부는 뒤집힌다. 야구의 매력은 극적인 역전에 있다. 1984년 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A는 친구의 빚 보증을 잘못 섰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한순간에 거덜날 거라고 생각하니 두렵기만 했다. 이 친구는 자살까지도 생각했지만, 다행히 시련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나는 사석에서 이 친구에게 "어떻게 해서 다시 일어서게 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극단적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자살하면 역전의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에 절대 그럴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야구가 그렇듯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늘 역전 가능성이 있다. 9회 말 투 아웃이라는 것은 경기가 거의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고, 여전히 역전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야구의 또 다른 매력은 홈런이다. 홈런 한 방이면 최대 4점까지 한꺼번에 뽑을 수 있다. 축구 배구 농구 등 다른 어떤 종목에서도 이처럼 단숨에 많은 점수를 올릴 방법은 없다. 오직 야구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야구의 규칙 중 특이한 것은 홈에서 시작해서 홈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와야 점수를 인정한다. 이는 인생과 비교해도 상당히 의미 있는 규칙인 것 같다.
젊었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수록 야구의 규칙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역전도 좋고, 홈런도 좋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에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중간에 겪었던 고통, 후회, 갈등 등을 모두 씻어내는 것을 뜻한다. 모든 것을 비우고 처음의 순결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나도 어느덧 환갑을 넘겼다. 환갑이라는 것은 만 60년을 살고 61년째 맞는 생일이다. 내 인생도 온전히 한 바퀴를 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인생의 한 바퀴에 후회는 없을까? 돌아보면 내 인생도 꽤나 파란만장했다. 어려서 부모님의 이혼, 방황했던 소년 시절, 군대에서의 사고, 월남 파병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나는 1, 2, 3루를 지나 홈으로 돌아왔다.
현재까지는 내 인생에서 큰 후회는 없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아니라 그간 챙기지 못했던 다른 삶들과 만나고 싶다. 야구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투수다. 투수가 공을 던져야 경기가 시작되고, 투수의 실력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야구에서 투수를 넘버원으로 친다.
하지만 경기의 실제 흐름을 이끄는 사람은 포수다. 그래서 나는 야구는 투수의 경기가 아닌 포수의 경기라고 생각한다. 가정으로 비유하면 투수는 아버지이고 포수는 어머니다. 아버지가 가장이고 가정의 중심인 것 같지만 실제로 한 가정을 이끄는 사람은 어머니다.
야구선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보면 재미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신발을 정리한다거나 소소한 물건을 챙기는 일은 주로 포수들이 한다. 사람을 챙기는 것도 주로 포수들의 몫이다. 투수들은 늘 사람들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일에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나는 이제까지 제법 화려한 투수로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솔직히 늘 투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남은 인생은 포수로 살고 싶다. 내게 주어지는 일을 묵묵히 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나는 내 인생에서 여러 번 홈런을 쳤다. 교사 시절 제자였던 아내와 결혼한 것, 아이들을 낳은 것, 그 아이들을 잘 키워서 시집 보낸 것, 이 모두가 대형홈런이 아니겠는가? 나는 타격왕, 홈런왕, 득점왕을 다 해 봤다. 더 바란다면 그것은 과한 욕심이다. 이제 남은 바람은 다른 누군가의 인생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것뿐이다.
● 지난해 10월18일부터 연재를 시작했던 '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가 24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내달 4일부터는 한국벤처산업의 산증인인 이민화 카이스트 교수 겸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의 글이 매주 월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