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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으로 깡으로… 숙대 ROTC 후보생 '각 잡힌' 생활

입력
2015.06.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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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부터 군인정신, 아침 체력훈련으로 정신무장

내무반 못지않은 기숙사 생활, 남학생 학군단 제치고 1위 저력

숙명여대 ROTC 후보생들이 교정에서 정갈한 단복 차림으로 도열한 채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강도 높은 훈련 덕분인지 경례 자세에서 한 점 흐트러짐을 찾아볼 수 없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숙명여대 ROTC 후보생들이 교정에서 정갈한 단복 차림으로 도열한 채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강도 높은 훈련 덕분인지 경례 자세에서 한 점 흐트러짐을 찾아볼 수 없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최근 한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 여자 연예인들이 11m 절벽에서 줄 하나에 의지해 수직으로 뛰어 내려오는 암벽 전면 레펠 훈련을 앞두고 공포에 질려 있는 모습이 방영됐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도 고개를 내젓는다는 혹한기 유격 훈련까지 악착같이 견뎌내는 걸 보며 대단하다는 탄성이 터져 나오는 한편으로 왜 자청해서 생고생을 하나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거다. 이들 역시 한마디로 “굳이 왜”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듣는다고 한다. 안 가도 되는 군대를 손 들고, 제 발로 찾아간 여대생 ROTC들의 얘기다.

화장품보다는 위장크림, 하이힐보다는 군화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2일 오전 6시 30분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인근 효창공원 운동장. 앳된 얼굴의 여대생들이 가쁜 숨을 내뱉으며 열을 맞춰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벌써 8바퀴째 2km를 달리는 구보 훈련이다.

숙명여대 ROTC 후보생 60명은 주말을 제외하고 일주일에 3번, 꼬박꼬박 조조 체력 단련 훈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팔 굽혀 펴기와 윗몸 일으키기도 출근도장 찍듯 빼먹지 않는다. 남성들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체력을 보완하기 위해선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늦잠을 자서 지각하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훈련 자체를 빠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숙대 학군단은 남성 후보생들이 속한 타 대학 학군단을 모두 제치고 군사훈련 성적 종합 1위를 차지하는 등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조조 체력 단련 훈련이 없는 날엔 군대 윤리 및 이론 등을 배우는 군사학 수업으로 정신 무장을 다지고 있다. 평상시엔 치마나 하이힐도 마다하지 않던 후보생들이지만 이날만큼은 단복 차림으로 무장을 한다. 단복을 입을 때는 각종 장신구 착용이 금지 돼 단복의 주름이 얼마나 칼 같이 잡혀 있는지가 옷 맵시를 뽐내는 관건이라고 한다.

후보생들이 얼마나 ‘군인화’되고 있는지는 말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나까’(~했습니다 아니면 ~했습니까)로 끝나는 어미뿐 아니라 군대 특유의 용어가 일상 생활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경우도 많다. 수업 발표 중간 말문이 막히거나, 자료를 잘 못 읽었을 경우 군인들이 자주 쓰는 “다시”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강의실이 한바탕 웃음 바다가 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통금에 제한된 외출… ‘각 잡힌’ 내무반 생활

하지만 군인으로 살기 위해선 여대생의 삶은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하는 제약도 따른다.

특히 숙대의 경우 ROTC 후보생 전원이 학교 기숙사 생활을 의무적으로 강제하고 있어, 군 내무반을 연상케 할 정도의 ‘각 잡힌’ 삶을 살고 있다. 아침 기상 시간(6시 20분)이 정해져 있어 늦잠은 꿈도 못 꾼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귀가 시간 12시를 사수하기 위해 전력질주를 해 달려오기 일쑤다. 단복 차림이라면, 학교 주변을 벗어나 멀리 외출하는 것을 삼갈 수밖에 없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더라도 학교 근처를 뱅뱅 도는 게 전부다. 외박은 집에 특별한 일이 있거나 시험기간 도서관에서 밤을 새는 경우에만 허용된다. 물론 갑작스레 자유가 통제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는 후보생들도 더러 있다. 숙대의 경우도 2010년 이래 기수당 2,3명씩 이탈자가 나온다고 한다.

군인으로 남아도, 남지 않아도 특별한 ‘스펙’

ROTC를 지원하는 이들의 성향은 크게 이른바 군인파와 비군인파, 두 부류로 나뉜다. 군인파 후보생들은, 처음부터 장기 복무를 목표로 잡고 군인이 되기 위한 하나의 루트로 ROTC를 지원한 경우다.

친구들 사이에서 ‘허솔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허선필 후보생(54기, 정치외교학)은 어렸을 때 여군 헬기조종사를 다룬 한 프로그램을 보며 여군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허 후보생은 “ROTC에 들어가기 위해 숙대 입학을 결정했다”고 할 만큼 의지가 확고했다. 하루라도 빨리 ROTC 일원이 되고 싶은 마음에 1학년 때부터 문을 두드렸고(2학년 때부터 모집 대상), 기숙사에 들어오기 전부터 선배들의 조조 체력 단련 훈련에 참여하는 등 열혈 단원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비군인파의 경우는 “리더십 개발을 위해”“자신의 한계에 도전해보고 싶어서” 등등 지원 사유는 각양각색이다. 여중ㆍ여고ㆍ여대를 나왔다는 이유진 후보생(55기ㆍ체육교육학)은 “남자들과 함께 훈련하며 사회생활을 미리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고, 다른 친구들이 갖지 못하는 저만의 특별한 강점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지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학군단 출신이었던 아버지와 오빠도 든든한 지원군으로 힘을 보태줬다.

후보생들은 ROTC 활동을 통해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꼽았다. 학창시절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지혜 후보생(54기ㆍ경영학)은 무방비 상태로 기초군사훈련에 참여했다가 혼쭐난 경험이 있다. 20kg의 완전군장을 메고 행군을 하다 보니 다리도 풀리고,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자신이 대열에서 뒤쳐지는 것으로 인해 동기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고 완주를 했다고 한다. 이 후보생은 “처음 기초군사훈련에선 팔 굽혀 펴기, 윗몸 일으키기, 3km 달리기 등 체력 검정에서‘불불불’을 받아 자존심도 상하고 절망했지만, 매일 훈련한 덕분에 ‘특특특’을 받아 냈다. 결국엔 제 자신과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경험은 누구도 쉽사리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스펙’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어학연수를 가거나, 각종 자격증을 따는 판에 박힌 자기개발 방식에서 진화된 일종의 차별화 전략이다. 실제 숙대 ROTC 1기생들의 경우 합동임관식 전부터 일부 대기업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을 정도로 취업 시장에서도 높은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 1기생들의 경우 임관식까지 마친 29명 중 14명이 대기업 및 항공사 등 일반 취업의 길을 택했고, 나머지 절반은 군대에 남을 예정이다.

남성주의 군대 문화 바꾸는 ‘소프트 파워’의 힘

여대생 ROTC 후보생들은 남성 중심의 획일화된 군대 문화를 바꾸는 데도 일조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특히 사관학교 생도들과 달리 평범한 대학생활을 병행하다 온 경험이 도리어 큰 장점으로 발휘될 수 있다는 평가다. 숙대 ROTC 1기생으로 후보생들을 관리하는 훈육관 박진아 중위는 “대학 생활과 아르바이트 등 병사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 많다는 점에서 그들의 눈 높이에 맞춰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여대생 ROTC들의 포부도 남다르다. 허 후보생은 “남동생이나 남자 친구들이 군대에 갔을 때 지휘관이 여자라서 정말 싫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속상했다”며 “여자라는 편견 없이 편한 누나나 형처럼 있는 그대로 믿고 기댈 수 있는 지휘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문제가 되는 관심병사 문제도 여군 지휘관 특유의 섬세함이 발휘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유진 후보생은 군 복지를 개선시켜 병사들이 ‘가고 싶은 군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무늬만 군인’ 아니냐는 일각의 편견을 깨트리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이지혜 후보생은 “의무가 없는 데도 지원한 만큼 제대로 해보겠다는 의지는 더 크지 않겠냐”며 “여군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갖고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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