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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무지, 묵인, 잠재적 동조

입력
2016.05.2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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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택시를 사랑한다.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택시가 있지만 최고는 역시 혼자 타는 택시다. 다음으로 좋은 건 아내와 함께 타는 택시인데, 그렇다고 아내보다 택시를 더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다.

얼마 전에 잡지 인터뷰를 했다. 아마 서평가라는 직업이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나는 택시를 타고 갔다. 일과 관련된 자리에 갈 때면 나는 늘 택시를 탄다. 그러지 않으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울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질문하던 기자가 내게 물었다. 세상에 책이 전부 사라진다면 무슨 일을 할 거냐고. 나는 택시 기사가 될 거라고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택시를 타면 기분이 좋거든요.”

“택시 타는 거랑 택시 모는 건 다르지 않아요?” 그 기자는 황당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물론 그 말이 맞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과 책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다르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해서 책에 대한 글을 쓰기를 직업으로 삼은 인간이다. 흔히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나 또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원고 매수로 환산해서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옷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한다. 가격표를 확인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이 바지가 원고지 12매라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원고 매수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건 딱 하나다. 원고지 1매를 쓰면 택시를 대충 18분에서 23분 정도 탈 수 있다는 것. 내가 쓰는 모든 원고의 십 퍼센트는 택시를 위한 것이다. 가끔은 순전히 택시를 타기 위해 원고를 쓰기도 한다.

아내 역시 택시를 사랑하지만 혼자 타는 택시는 좋아하지 않는다. 택시 기사가 위협적인 태도로 대한다거나 카드 결제를 하겠다고 하면 짜증부터 낸다거나 속도를 줄여달라고 부탁해도 무시하고 난폭 운전을 한다거나 기분 나쁜 농담을 건넨다거나 했던 기억들 때문이다. 나는 물론 안타까웠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당하지 않은 일이 아내에게 일어난 것은 단지 운이 나빠서라고, 어쩌면 아내가 너무 예민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치 지난 17일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혐오살해가 아니라 ‘묻지마 범죄’라고 애써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사건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의 포스트잇을 통해, ‘여성 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를 통해, 트위터를 비롯한 SNS를 통해 터져 나온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나는 지금까지 내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그건 전혀 오해가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가 (여자라서) 겪어야 하는 일들은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고, 내가 (남자라서) 겪지 않아도 되는 일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건 아무리 좋게 말해도 무지이거나 묵인이거나 잠재적 동조이지 오해가 아니다.

비단 택시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길거리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병원에서,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클럽에서, 집에서…. 심지어 태어나기 전부터 여성들은 크고 작은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위의 단어들과 함께 여성, 범죄 등의 키워드를 검색해보라).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 범죄의 잠재적 피해자가 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여성혐오 사회가 맞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혐오가 아니라는 주장들은 그 자체로 우리가 여성혐오 사회에 살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다.

이런 글을 쓰고 있자니 꼼짝없이 우울해진다. 아무래도 택시를 타러 나가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아내는, 그리고 다른 모든 여성들은, 대체 언제쯤에나 기분 좋게 혼자 택시를 탈 수 있지?

금정연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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