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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없이 느끼고 몰입했던… 어린 시절 생각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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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없이 느끼고 몰입했던… 어린 시절 생각나세요?

입력
2014.12.22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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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ㆍ야심ㆍ자의식 같은 집착 없이

온전한 유희로서의 창조 행위

예술가들 원하지만 얻기 힘들어

어째서 어떤 아이는 작가가 되고, 어떤 아이는 화가가 되고, 어떤 아이는 가수가 될까. 무슨 이유로 어떤 아이는 책을 읽으면서 희열을 느끼고, 어떤 아이는 색연필을 쥐었을 때 더욱 몰입을 하고, 어떤 아이는 소리 내어 노래를 부를 때 가장 격렬하게 자신을 표현할까. 오래 전부터 나는 그게 궁금했다. 주변의 환경이 가장 큰 원인일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집에는 책이 별로 없었는데, 나는 작가가 됐다. 유전적인 이유가 작용하는 것일까. 형은 그림을 전공했고, 나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며, 아버지는 당신 스스로 “내가 손재주는 좋은 편이었지”라고 자주 얘기했으니 (확인은 못해봤다) 유전적 이유가 조금은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술의 영역에 국한시킬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어째서 어떤 아이는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고, 어째서 어떤 남자 아이는 화장하는 걸 좋아할까.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다.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다. 흔해빠진 정의지만 이 말 외에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예술가란 온 힘을 다해서 ‘창조적인 혁신’을 이루려는 사람이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유희에 전념하는 사람이다. 아름다움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니, 아름다움의 개념조차 없이 온전히 창조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이 노는 걸 보고 있으면 예술가란 이런 것이구나 깨닫게 된다. 그들은 통장의 잔고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어쩌면 세뱃돈 모아둔 게 내 통장 잔고보다 많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작품을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자의식도 없으며, 자신의 작품으로 세계를 제패하고자 하는 야심도 없고, (이건 나도 없고, 대부분 없나?) 앞으로 이 일로 과연 먹고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없다. 무작정 그림 그리고, 아무렇게나 노래 부르고, 보이는 대로 읽으며, 온몸을 뒤흔들며 춤을 춘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런 상태를 꿈꾼다.

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이런 질문을 자주 해왔다. “예술가들은 왜 그렇게 혼신의 힘을 쏟으면서 창조적 혁신에 몰두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 중에는 불순한 의도를 숨기고 있는 사람들도 꽤 많다. 예술가들의 에너지나 뇌의 구조를 창의력이 필요한 기업에 이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새로운 기술과 뜻밖의 창의력을 결합하는 방법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예술가들을 분석하겠다니 기분 좋은 일이긴 하지만 과연 연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내가 나를 들여다봐도 참으로 한심할 때가 많고, (예를 들면 밤새 게임하다가 ‘이것도 다 소설 쓰는데 도움이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든가) 혼신의 힘을 쏟으면서 노는 데만 집중하고 있을 때가 많은데 과연 연구가 제대로 될까. 어쨌거나 그들의 연구 결과는 대체로 이렇다. ‘창조성의 동기 부여는 내재적 동기가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외부에서 자극을 받은, 외재적 동기에 의한 행동은 효율성의 사고가 지배하지만 내재적 동기로 시작된 행동은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대안들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위험한 비유이긴 하지만, 직장 상사가 지시한 일은 대충대충 끝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한편, 회식의 마지막 자리 노래방에서 본인의 흥으로 시작된 노래 부르기는 혼신의 힘으로 완성도를 끌어올린다는 것이,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의 차이라고 할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무언가 창작하기 위해서는 아이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나 역시 아이의 에너지로 예술을 할 때가 가끔 있다. 그림을 그릴 때 자주 그렇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머리가 텅 비고, 순전히 선에 집중하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특별한 성취도 필요 없고 보상도 원하지 않는다. 온전하게 완성된 하나의 선, 내 맘에 쏙 드는 한 줄의 선을 나는 간절히 원한다. 글을 쓸 때도 그런 순간이 온다. 소설가라는 자의식이 사라지고, 글쓰기의 완성도에 집착하지 않고, 그저 온전히 매력적인 한 줄의 문장을 간절히 원할 때가 있다.

글을 쓰고 가끔 그림도 그리는 사람으로서 두 가지 장르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창작된다는 걸 순간순간 깨닫는다. 빨래가 끝나 바싹 마른 옷들을 차곡차곡 뇌의 서랍에다 개켜 넣는 일이 글쓰기라면, 서랍의 바닥에 뭐가 있나 보기 위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던 옷을 헤집어 꺼내서 바닥에 던져 놓는 일이 그림 그리기 같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모아야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흐트러뜨려야 한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래서 이강훈씨를 만나고 싶어졌다.

김중혁 작가가 그린 이강훈씨
김중혁 작가가 그린 이강훈씨

이강훈씨는 (내가 알고 있는) 국내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다. 소설가 김연수씨와 함께 쓴 ‘대책 없이 해피엔딩’의 일러스트 작업을 이강훈씨가 맡기 전부터 나는 그의 작품을 잘 알았고, 좋아했다. 그의 색과 선을 부러워했다. 그가 작업한 표지도 좋아하며 시사주간지에 실리는 그의 일러스트 또한 늘 감탄하며 본다. 그는 또한 ‘나의 지중해식 인사’ ‘도쿄 펄프픽션’의 저자이기도 한데, 심지어 글도 무척 잘 쓴다.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언젠가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작정하고 만난 그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을 선택한 데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어요. 좋아하는 걸로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꾸준하게 수입이 있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그림을 좋아해주는 분들도 많이 있고, 그래서 꾸준히 일을 할 수 있었는데, 어느 날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이게 맞나 싶더라고요. 말하자면 ‘예술병’에 걸린 거죠(웃음).”

‘예술병’이란 단어가 중요하다. 이강훈씨는 이 단어를 말하면서 겸연쩍다는 듯이 웃었지만 뉘앙스는 좀더 복잡하다. 일러스트레이트는 대체로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답하는 예술이다. 어떤 요청 속에서 상상력을 작동시켜야 하고, 틀 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일러스트레이트 역시 예술의 한 분야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사람은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어떤 사람은 순수한 예술의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은 온전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사람은 반 정도만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강훈씨가 예술병이란 단어를 말하는 순간 예술이라는 단어에 대해 고심했다. 그리고 이어진, 예술병에 걸렸던 ‘바로 그 순간’에 대한 묘사 역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제가 여행을 좋아하는데, 여행을 가면 스케치북은 잘 안 들고 다녀요. 그런데 2013년에 보름 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제 그림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였어요. 방콕의 조그마한 박물관 앞에서 서양 여자애가, 아마 10대였을 것 같은데요, 배낭여행 중인 거 같았고 반바지에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금발의 그 여자애가 불량스러운 자세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그 장면을 너무 그리고 싶은 거예요. 사진으로라도 찍으면 좋겠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러기도 힘들었어요. 기억하려고 했죠. 계속 보고 기억해서 숙소에 돌아온 다음 그 아이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왜 그리고 싶었는지는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얼마 전에 시인들의 낭독회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만난 첫 번째 시적인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아, 그 여자애를 본 게 나한테는 시적인 순간이었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데일리 드로잉’을 시작했어요. 특정한 주제나 대상 없이 그냥 빈 종이 앞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계속 그리다 보면 그림의 끄트머리에서 다음 끄트머리로 연결되는 거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어요.”

“아무것도 그릴 수 없는 날도 있겠죠?”

“있죠. 스케치북을 가만히 들여다봐도 못 그리겠더라고요. 다시 물꼬가 터지려면 시간이 좀 걸려요.”

“어떤 부분에서 물꼬가 터져요?”

“저는 주로 선에서 시작돼요.”

어떤 사람은 색에서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형태에서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선에서 시작한다. 그의 스케치북을 보고 있으면 ‘선에서 시작한다’는 게 어떤 뜻인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이강훈씨는 선을 처음으로 그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작년 여행 이야기로 돌아가서, 왜 내가 그림을 그릴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시간을 앞으로 돌리고 계속 돌려보니까 처음으로 제가 그림 그리던 장면이 기억나더라고요. 다섯 살 때인가 여섯 살 때인가, 12색 사인펜을 앞에 두고 전쟁 장면을 거침없이 그리던 제가 보였어요.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정말 즐거운 일이었구나 싶었고, 그때처럼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나도 글의 앞으로 돌아가서 함께 질문을 해보게 된다. 우리는 다시 아이처럼 예술을 대할 수 있을까. 아이의 에너지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이강훈씨는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도 무척 좋아해서 자신의 고민을 짧은 픽션으로 쓰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화가의 이야기다. 자고 일어나보니 무엇인가 잘못 돼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정확히 무엇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다 캔버스 앞에 앉았는데, 도무지 선을 그을 수 없는 거다. 화가의 이야기는, 자신이 계속 해오던 일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했던 이강훈씨의 이야기고, 아이의 에너지를 잃어버린 채 익숙한 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이야기고, 매일매일 선을 잃어버리고 매일매일 자신의 새로운 선을 찾아내야만 하는 모든 예술가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강훈 씨의 이야기는 다음 회에 계속.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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