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길을 갈 때는 거칠 것이 없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선 굵은 삶을 지향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집권 후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집권 초 단행한 금융ㆍ부동산실명제,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 등은 최대 성과로 꼽힌다. 그러나 차남 현철씨의 권력 사유화 논란과 경제정책 실패로 인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초래라는 뼈아픈 과오도 남겼다. 전임 노태우 전 대통령 집권기보다 진전이 없었던 대북정책도 한계로 지적된다. 대형 사고가 잦았다는 점도 역사로 남게 됐다.
금융실명제 부패청산 기틀… IMF위기 뼈아픈 과오
경제 분야는 김 전 대통령의 공과가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이다. 취임 초 전격 단행한 금융ㆍ부동산실명제는 군부독재 이래 수십년간 이어졌던 부패 청산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후속 과제였던 재벌개혁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고, ‘세계화’로 상징되는 경제정책마저 꼬이면서 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치욕적 상황을 맞게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93년 8월 12일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를 발동해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법률’을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담화문을 통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고 전격 실시 배경을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에 앞서 취임과 동시에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전격 공개하며 1급 이상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를 의무화하기도 했다. 금융실명제와 더불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조치였다. 김 전 대통령은 “이것이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공직사회의 반발도 제압했다. 일련의 경제개혁 정책은 95년 1월 부동산거래 실명제 도입으로 이어졌다.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두고 선진국 진입의 문턱을 넘었다고 선전하며 기대감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OECD 가입을 서두르는 동안 곳곳에서 켜진 경제 적신호에는 안이하게 대처했다. 94년 1월 재계 14위 한보그룹 계열사 부도를 시작으로 삼미그룹ㆍ기아지동차 등 대기업이 연이어 도산했지만, 이렇다 할 정책 대응을 하지 못하면서 결국 IMF에 경제주권을 빼앗기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했다.
비슷한 시기 차남 현철씨가 한보그룹 비리 사건에 연루돼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구속돼 옥살이를 하면서 기존 개혁 성과마저 퇴색된 측면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며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김 전 대통령이 18년 전 IMF 구제금융 신청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했던 날(97년 11월 22일)과 같은 날 영면에 들었다는 건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하나회 청산, 5ㆍ18특별법 제정…남북관계는 요동
김 전 대통령 재임 중 평가 받는 대목은 군사독재 잔재 청산이다. 12ㆍ12쿠데타로 집권했던 전두환ㆍ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수사는 문민정부 출범 당시부터 논란거리였다. 잇따른 고소ㆍ고발에도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버텼고 신군부의 반란죄와 내란죄 등을 따지지 않고 불기소 처분했다. 하지만 전ㆍ노 두 전 대통령에 대한 비자금 폭로 이후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김 전 대통령은 5ㆍ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고, 결국 검찰은 96년 1월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 기소했다.
‘군정종식’을 내걸었던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전격적으로 하나회를 숙청한 뒤 주변에 “깜짝 놀랐제”라며 은근한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집권 초 번개 같이 실세 장군들을 전역 조치 한 덕분에 군부 쿠데타 위험성을 상당 부분 줄이고 군 문민화에도 일조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남북관계 관리 능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통일부총리 직을 신설하고 한완상 전 서울대 교수를 첫 부총리에 임명하는 등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펼쳤다. 93년 3월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북한에 돌려보낸 것도 대표적 화해 정책이었다. 북한이 그 해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미국이 영변 핵시설 폭격을 고려하는 등 1차 북핵 위기로 한반도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그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해 “전쟁을 중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한국군을 한 명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위기 상황을 저지했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특히 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방북해 북핵 동결에 합의하고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 분위기까지 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해 7월 김일성 북한 주석이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정상회담은 무산되고, 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터지는 등 남북관계는 진전이 없었다.
김 전 대통령 집권 후반기 대형 인재(人災)가 줄을 이었다는 점도 자주 언급된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부산 구포역 열차전복 사고, 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사고 등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이동현기자 nani@ha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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