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한 바퀴 돌며 화류 구경"
조선시대 전통 풍습으로 즐겨
소실된 도성 복원 70% 정비
인왕산 구간 빼어난 풍광 일품
‘도성의 둘레는 40리나 되는데 도성을 한 바퀴 돌아서 도성 안팎의 화류를 구경하는 것은 멋있는 놀이다. 새벽에 출발해야 저녁 종 칠 때쯤에 다 볼 수 있는데, 산길이 깎은 듯 험해서 지쳐서 돌아오는 사람이 많다.’(유득공의 ‘경도잡지’ 중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유득공은 한양의 세시풍속을 소개한 책 ‘경도잡지’에서 도성을 걷는‘순성(巡城)’을 이렇게 묘사했다. 처음에는 과거 시험을 보러 상경한 선비들이 도성을 돌며 급제를 빌었는데 이것이 도성민들에게도 전해져 봄과 여름이면 짝을 지어 성곽을 돌면서 경치를 즐기는 순성 풍습으로 자리잡았다. ‘순성놀이’,‘순성장거’로 불리던 전통놀이는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자취를 감췄다.
기억 속으로 사라졌던 순성의 전통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소실된 한양도성의 일부분이 복원되고, 걷기 열풍에 힘입어 도성의 옛 길을 찾는 도보객들이 늘어나면서다. 2012년 11월 한양도성길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재목록에 오르면서 주목을 받은 것도 요인이 됐다. 3년째 한양도성길 해설사로 활동해온 홍성규(53)씨는 “한양도성은 자연을 손상시키지 않고 지형을 그대로 따라가며 성곽을 쌓았기 때문에 한 바퀴 돌고 나면 서울의 옛 지형과 역사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서 “예전에는 역사에 관심이 있는 소수가 찾았다면 이제는 자녀를 동반한 가족단위 도보객이나 외국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한양도성길은 조선 수도인 한양을 둘러싼 도시 성곽을 따라 난 길이다. 성곽은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 등 내사산 능선을 따라 축조됐다. 한양도성은 평균 높이가 약 5~8m, 전체 길이가 약 18.6km로, 현존하는 세계 도성중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됐다. 현재는 전체구간의 70%인 12.8km 구간이 원형에 가깝게 정비됐다.
사직터널에서 시작해 인왕산 자락의 성곽을 따라 걸었다. 국사당, 선바위와 부처바위를 지나 인왕산 자락의 서쪽 끝으로 이어지는 성곽 구간에서는 빼어난 풍광이 펼쳐졌다. 내사산 중 풍수지리상 우백호를 상징하는 인왕산은 조선 중기 화가 겸재 정선이 단골 소재로 삼았을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인왕산 구간 중 사직근린공원 부근은 한양도성 전 구간에서 성 안과 밖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공원에서 만난 종로구 주민 이경화(65)씨는 “도시 빌딩 숲을 내려다 볼 수 있고 걷기 편해서 성곽 안쪽의 넓은 길을 자주 걷는다”고 말했다.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낙산 구간도 경사가 완만해 산책하기에 좋다. 도성길을 잇는 내사산 중 가장 낮은 낙산은 산의 형세가 낙타를 닮았다고 해서 낙타산, 타락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흥인지문 건너 동대문성곽공원에서 시작되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 만나게 되는 성곽길은 태조부터 숙종 때까지 시대별 축성 기술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구간이다. 동대문성곽공원 초입에는 성곽 돌에 축성 관련 글자를 새겨 넣은 ‘각자성석’도 자세히 볼 수 있다. 야경 감상도 이 구간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서울의 ‘몽마르트르 언덕’이라고 불리는 낙산 공원에는 성벽을 따라 조명시설이 잘 설치돼 있어 밤에도 산책을 즐기는 주민이나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남산 공원까지 이어지는 남산 구간은 서울의 지리적 중심에 해당한다. 숭례문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전국의 봉수가 전달되던 중앙 봉수대인 남산 봉수대로 향하는 길을 숨가쁘게 오르다 보면 성곽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남산 동쪽 능선을 따라 조성된 태조시기의 성벽은 축성된 지 600여 년이 지났지만 처음 쌓은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2007년 4월 개방된 북악 코스는 40년 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구간이다. 2시간 걸리는 북악산 코스는 출발지에 따라 와룡공원 말바위 안내소, 숙정문 안내소, 창의문 안내소에서 오르는 세 가지 코스가 있는데 창의문 안내소 구간은 급경사 구간이 이어져 노약자나 어린이가 오르기엔 다소 힘이 든다. 가족 도보객은 말바위 안내소나 숙정문 안내소에서 오르는 구간을 택하면 수월하다. 세 코스 어디를 이용하든 북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에 오르면 맑은 날에는 멀리 관악산까지 보일 정도로 시야가 좋다.
성곽 속에 새겨진 역사의 축적을 살펴보는 것도 한양도성길을 걷는 숨은 재미다. 한양도성은 태조 5년(1396)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8월 13일부터 9월 30일까지 2회에 걸쳐 처음으로 축조됐다. 전국에서 동원된 백성이 19만 9,260명에 달한다. 도성은 세종 때에 새롭게 단장한다. 전국에서 백성 32만 2,400명과 기술자 2,211명, 수령과 인솔자 115명을 불러들여 흙으로 쌓았던 성곽을 전 구간 석상으로 다시 쌓았고, 숙종 때 이를 다시 보수했다.
서울시는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온 힘을 쏟고 있다. 한양도성이 축조 이후 지속적인 보수를 통해 진정성 있게 보존ㆍ관리돼 왔고 조선시대 도성의 축성 과정, 축조 형태, 수리기술을 확인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세계유산의 등재 기준에 부합하다는 것이 시 안팎의 판단이다. 또 조선시대 문학작품 다수와 겸재 정선을 비롯한 화가들의 그림 주제가 되는 등 주요한 예술ㆍ문학작품을 보유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는 것도 매력이다.
한양도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전 세계 수도 중 유일하게 도성을 세계유산으로 보유하게 된다.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 아이콘으로 서울성곽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시는 한양도성의 문화재를 비롯해 장수마을, 이화마을 등 주변의 성곽마을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는 등 서울의 브랜드를 높이는 효과를 누릴 것으로 전망한다. 등재 여부는 2017년6월에 정해진다.
홍씨는 “성곽의 돌과 축조방식을 살펴보려면 성곽 밖으로 걷는 것이 좋다”면서 “도성길은 대부분 성 안쪽에 조성돼 있어서 주로 어깨높이 정도의 보이는데 낙산 구간의 경우 전 구간이 성 바깥에서 걸을 수 있게 조성돼있어 성곽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한양도성길을 찾는 도보객을 위해 ‘서울 한양도성길 스탬프 투어’ 무료 해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희망일 기준 최소 3일 전에 서울 한양도성 홈페이지(seoulcitywall.seoul.go.kr)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시 관계자는 “하루 일정으로 도성길을 다 돌아보기 무리가 있는 만큼 각 코스별로 유적과 볼거리, 맛집 탐방 등 몇 차례에 걸쳐 순성에 나서는 것을 추천한다”면서 “성곽지도, 완주 기념 배지 등 각 구청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순성의 재미를 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양도성길에 대한 자세한 안내는 서울 한양도성길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손효숙기자 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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