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투병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썼으므로 내가 또 쓴다 한들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내가 고등어잡이 배를 타고 월남한 이야기는 거의 안 알려져 있는 사실이어서 꼭 들려주고 싶다.
나는 지금은 이북 땅인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 거진리 111번지에서 명(命)자 수(壽)자를 쓰는 선비의 5대 독자로 태어났다.
우리 선대는 고성군 일대에서 한학을 해온 선비 집안이었는데, 아버님 역시 20대에 면서기를 지냈고 나중에는 강원도 관재국 관리과장까지 역임한 엘리트였다.
내 고향은 금강산 한 자락인 내금강에 있었다.
기억은 분명치 않아도 산수가 빼어난 곳이었다. 집이 유복한 편이라서 4, 5세 때부터 세발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동네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타고 잘난 척을 하다가 강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이 강물(남강)은 후에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휴전선의 일부가 되었다.
1948년, 내금강국민학교 3학년에 진학했을 무렵 이미 이북의 상황은 급박해져 있었다. 아버님은 어업조합서기를 지낸 경력 때문에 당국에 수시로 불려 다니며 고통을 당했다.
우리 일가는 월남을 강행하기로 하고 일단 아버님이 단신으로 강을 건넜다.
물론 남과 북이 마음대로 물건도 교환하고 사람도 오고 갈 수 있는 때이긴 했지만, 일가가 단체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당시 월남하는 방법은 산을 넘어가는 것과 고등어 잡이 배를 타고 밀항하는 길 두 가지가 있었다.
집에서는 어린 몸으로는 산을 넘을 수 없다 하여 나는 고등어 배를 이용하기로 했다. 당시 고등어 배는 강의 이쪽저쪽을 오가며 이북의 고등어를 이남의 쌀이나 밀가루와 바꿔가고 있었다.
어머님(원춘옥ㆍ元春玉ㆍ1986년 작고)은 고등어 배 선장에게 뇌물을 줘 빈 고등어궤짝에 나를 끼워주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내 팔자란 게 기구했나 보다. 배가 높은 파도를 만나 표류를 해버린 것이다. 하루면 도착할 길을 1주일이나 걸려, 그것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궤짝에 갇힌 채 겨우겨우 주문진 항에 닿을 수 있었다.
주문진 항에 도착해서도 나는 보름 가까이 거리를 떠돌아 다녔다. 항구에서 나를 기다리던 아버님이 일이 잘못된 줄 알고 그냥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가게 앞을 지날 때였다. 찐빵 가게였는데 유리 창 안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찐빵이 가득했다.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유리창 안을 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너 주일이 아니니?”
소리 나는 곳을 돌아보니 앞치마를 두른 아버님이 서계신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 찐빵 가게는 이모부 뻘 되는 먼 친척 아저씨가 경영하던 곳으로, 아버님은 그 집에 기식하며 가족이 다 월남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셨던 것이다.
이듬해 봄 어머님과 누님이 월남해왔고 우리 가족은 열심히 일했다. 어머님이 생 오징어를 사오면 온 가족이 매달려 오징어 배를 따서 말린 다음 시장에 내다팔았다.
그 덕에 우리는 얼마 안가 조그만 목선 한 척을 살 수 있었고, 목선을 부두에 댈 수 있는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 진리로 옮겼다.
아버님은 그곳에서 아는 분 소개로 진리어업조합 서기로 일하게 됐다. 이때까지가 내 어린 시절의 마지막 평화 시대였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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