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 젊은이들 '촛불 피스토크'
"日 국민들, 개헌·원전에 반감 많아"
"저항 포기한 국민들, 日의 큰 문제… 정치인들 변화시킬 방법 고민해야"
“히로시마 평화기념 공원 한가운데에는 ‘편안히 잠드소서. 다시는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위령비가 서 있습니다. 아베 정부가 집단적 자위권이란 이름으로 헌법 9조를 정말로 개정하면 그 잘못을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 (히로시마 출신 재일동포 2세 유미 야마무라·20·대학생)
1945년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는 인류 역사상 첫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폭탄에 붙여진 깜찍한 코드명(리틀 보이)과 달리, 그 피해는 참혹하고 끔찍했다. 폭격으로만 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 2만명은 한국인이었다. 도시의 70%가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사흘 뒤엔 나가사키에 또 한 기의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일본은 전쟁 가해국이면서 세계 최초로 원폭 피해국이 됐다.
그로부터 꼭 70년이 흘렀다. 히로시마 시내에서 차로 30분 남짓 떨어진 히로시마시립대학교 운동장에선 지난 4일 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모인 젊은이들이 촛불을 켜고 둘러 앉았다. 히로시마시가 원폭의 참상을 되새기고 평화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달하기 위해 2008년부터 주최해온 ‘히로시마 평화캠프’ 참가자들이다. 올해로 8회째를 맞은 캠프에 기자는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참가했다.
피스토크(peace talk)는 캠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프로그램. 올해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과연 평화로운가”라는 물음에서부터 시작했다. 질문을 던지자마자 곳곳에서는 “노(No)”라는 대답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중동이나 우크라이나 등 현재 분쟁 및 전쟁이 실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 이유로 들었지만, 일본인으로서 현재 일본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평화롭지 않다는 답변도 있었다. 한번은 무기(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으로, 또 한번은 발전소(후쿠시마 원전)로 두 번씩이나 참혹한 ‘핵의 재앙’을 겪은 일본인들에겐 핵과 평화의 의미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국적을 막론하고 참가자들은 핵무기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 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대학생 안나 아쿠오셀리엔테(21)는 “히로시마 원폭은 힘이 있다고 해서 이를 잘못 사용하면 인류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 충격적 사건”이라며 “더 이상 핵무기를 사용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대만에서 온 시민단체 활동가 슌웨이 왕(30)는 “핵은 무기일 때나 전력을 생산할 때나 소수자의 희생이 수반되는 폭력적 특징을 지닌다”며 “많은 핵보유 국가들이 작은 섬이나 상대적으로 힘없는 국가 영토에서 핵실험을 해온 것도 이를 잘 드러낸다”고 말했다. 독일의 고등학생 콘라드 에렌버그(18)도 “히로시마 역시 미국의 핵무기 테스트의 희생양이 됐다. 상공에서 한 번 원폭 투하 버튼을 누른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고 거들었다.
일본 원전의 첫 수출국이었던 대만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이 원전 건설을 전면 중단했다는 내용이 환기되자, 토론은 자연스럽게 원자력발전 문제로 넘어갔다. 히로시마 원폭과 후쿠시마 사고를 연달아 겪은 일본인 참가자들은 입을 모아 반핵감정을 드러냈다. 대학생 아오키 미나코(22)는 “원전이 멈췄지만 후쿠시마, 체르노빌 사람들의 고통을 계속되고 있다”며 “이제는 일본도 세계적 흐름에 따라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 사용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노후원전이 있는 시마네현에서 왔다는 대학생 쿠미코 아오키(22)도 “아버지가 원전에서 근무하고 계시지만 그 위험성 때문에 우리 가족은 원전에 반대한다”고 했다.
물론 “일본은 에너지 자원이 부족해 원자력 발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마나베 아야노·20)는 보수적 시각도 있었다. 마나베는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 이후 모든 원전을 멈춘 일본 정부가 원전을 재가동하려는 의지를 지닌 데 대해 반대 의견을 피력하는 한편, 시민사회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일본인 대부분이 원전은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저항하기를 포기한 것 같습니다. 사회 시스템이 비정상적이어도 이를 바꿔보려는 의지가 없어요. 그게 현재 일본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아베 신조 총리가 밀어붙이고 있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견이 오갔다. 일본 참가자들은 “현재 일본 내에선 젊은이뿐 아니라 기성세대들도 평화를 수호하는 헌법 9조 개정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두 달째 일본에 머물고 있다는 알렉스 매닝(영국)은 “정권을 단순 비판하기에 앞서 이 경직된 사회가 어떻게 정치인들에게 충격을 주고 변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고 강조했다.
참가자들은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전인류에게 많은 교훈을 남긴 종전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정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타인에게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파울라 미라몽·스페인·22) “커다란 사건이 벌어질 당시에만 반짝 관심이 집중되고, 이후 피해자들의 삶 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장기적 요인”(콘라드) 등 진단을 내놨다.
“히로시마를 통해 배우듯, 평화의 가치를 알아가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워요. 하지만 끊임없이 그 중요성을 상기해야 하죠. 전쟁 중이던 70년 전에 비하면 지금 일본은 평화로울 지 몰라도 앞으로의 평화는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요. 미래 평화를 위해 젊은이들이 나서야 해요.” 토론을 정리하는 이쿠미 츠가와(25·유치원교사)의 이 말에 참가자들은 모두 박수를 보냈다.
이들에게 평화는 결코 복잡하지 않았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타인에 대한 인간애를 발휘하는 것, 이를 통해 안정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란다. 하지만 이 간단한 명제가 현실에선 쉽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산으로 둘러싸여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캠프장 불빛은 밤 늦도록 꺼질 줄 몰랐다. 4일 개막한 히로시마 평화캠프는 7일까지 이어진다.
히로시마(廣島)= 김혜경 객원기자 salutkyeong@gmail.com
김혜경 객원기자는 한국일보 출신으로 사회부 기자 시절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직접 현장 취재했다. 본사 퇴사 후 그린피스를 거쳐 현재 국경없는기자회 한국통신원 겸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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