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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만해 한용운의 딸 한영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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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만해 한용운의 딸 한영숙씨

입력
2012.02.2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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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으로 비롯된 3.1운동은 세계사를 바꿨다. 중국에서 5.4운동이, 인도에서 비폭력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작 독립선언을 한 지식인들의 이후 행로는 선명하지 않다. 끝까지 반일의 정신을 지킨 이로 만해 한용운(1879~1944)이 꼽히는데 체포 후 일본 검찰의 조사에서부터 독립운동을 계속 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당당히 밝힌 이가 그 뿐이었다.

충남 홍성에서 하급관군으로 몰락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만해는 조혼풍습에 따라 열 네살 때 전정숙씨와 혼인을 했는데 출가하던 해에 아들 보국(1904~1977)씨를 얻었다. 아버지의 타향생활로 홀로 큰 보국씨는 고향에서 신간회 활동을 하다가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6.25전쟁이 터지면서 월북을 한다. 그는 1남5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어려서 죽고 세째딸인 명심씨가 2001년 말에 북한잡지 '통일신보'에 기고를 하면서 만해의 손녀 다섯과 후손이 북한에 산다는 게 알려졌다.

만해는 1933년 성북동 유적인 심우장을 지으며 유숙원(1898~1965)씨와 두번째 혼인을 했고 그 사이에서 딸 영숙(78)씨를 얻었다. 영숙씨에게는 2남1녀가 있다. 오랫동안 유일한 후손으로 거론되던 영숙씨는 언론에 얼굴을 자주 드러내지 않아서 1992년에는 '손녀'를 자처한 사람이 그가 가짜 딸이라고 소송을 걸기도 했다.

만해의 딸을 만나기 전 그렸던 인상은 약간은 초췌하고 꼬장꼬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영숙씨는 모피옷을 입은, 재치있고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료가치가 있는 말은 이미 다 했으니 특별히 더 해줄 말은 없다"고 했다. 이제는 "노인이라 기억력이 흐리다"는 그의 이야기는 과거 증언과도 조금 달랐다. 아버지의 작품에 대해서도 선명한 인상이 없어서 사상가의 계승자는 정신을 따르는 이들이지 후손이라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상식을 새삼 확인했다.

_미간과 코 있는 데가 만해 선생 사진과 닮으셨네요.

"그럼, 가짜가 아니니까.(웃음) 진짜가 아니면 그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물러났겠어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뭐 다 알려져 있어서 내가 더 보탤 말도 없어요."

_돌아가시던 날은 기억나세요?

"돌아가시기 전날 밤, 등화관제가 있었어요. 왕하고 (사이렌이) 불면 검은 커튼을 내려야 돼요. 컴컴한데 (아버님이) 소변 보고 누우시던 때는 괜찮았어요. 새벽에 일어나보니 운명을 하신 거예요. 그때는 전화도 없을 때니까 어머니가 다니시면서 연락을 했어요.(1971년 나온 <나라사랑>2집에서 영숙씨는 "공습경보가 울리는데 창문에 검은 휘장을 내리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잤는데 이튿날 아침 어머님과 함께 잠에서 깨어보니 언제부터인지 아버님께서는 혼수상태에 빠지신 채…중략…그렇게 묵묵하신 채로 몇 시간을 고통 속에 보내시다 그날 오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고 회고했다. 또한 돌아가시던 때는 "봄날 밤"이라고 썼는데 만해는 6월29일 입적했다.)"

_사료에는 사인이 신경통 각기병 영양실조라고 하던데요. 자주 굶으셨나요?

"그때야 다들 못 먹고 살 때지만 우리라고 유별나게 못 먹지 않았어요. 풀죽 먹은 적 없고 밥 세끼 먹고 살았어요. 아버지가 원래 혈압이 높았는데 눈이 온 날 마당을 쓸다가 풍이 와서 쓰러지셨어요. 적음스님이 오셔서 침을 맞으면서 가료를 해서 정상적인 걸음은 아니지만 단장(지팡이)을 짚고 다니셨는데 그게 심해져서 돌아가신 거야. 주변에서도 도와주셔서 그렇게 어렵게 산 게 아니라고 내가 몇 년을 이야기를 해도 그런 게 안 고쳐져요. 내가 이러니까 인터뷰를 하기가 싫어. 뭐든지 너무 흥미위주로 만들어버리니까. 내가 일본 대사관저가 들어와서 성북동 심우장에서 이사갔다고? 아니 그 사람들 들어온다고 터주가 왜 떠나, 거기가 떠나면 몰라도. 나 보편적인 보통사람이야."

_아버님이 학교를 못 다니게 하고 호적도 안 만들었다, 그건 맞지요?

"학교는 못 다니게 했지. 거기 못 다닌 덕에 일본말을 전혀 못하잖아. 3년 배웠으면 파바박 했을텐데.(웃음) 대신 아버지가 공부를 가르치셨지. 한글, 그때는 언문이라고 했지, 한문 붓글씨 산수 그걸 배웠어요. 교재? 한자는 천자문하고 그거 뗀 다음에는 병풍에 있는 글자를 가르쳤어. 당시 수학은 구구단과 가감승제(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할 수 있는 수저주머니 같이 생긴 교재가 있었어. 한글은 천자문 아래 한글로 표시가 되어 있어서 천자문을 떼면서 한글도 익혔지. 아침에 눈뜨면 세수하고 오전에 공부하고 낮에는 붓글씨 쓰고 숙제하고. 나중에 해방이 되어서 혜화초등학교 3학년으로 들어가니까 학교 공부가 재미가 없었어. 한글 다 알지, 산수 다 알지. 이화여중을 갔는데 6.25가 터지면서 그만 다녔지. 나중에 야간고등학교 조금 다녔어."

_공부 가르칠 때는 자상한 아버지였나요?

"내가 화낼 일을 안하니까. 그리고 옛날에야 아버지하고 그다지 가까이 있지를 않았지. 요즘에야 가족끼리 오손도손 지내고 아내하고 자식한테도 사랑한다 그러지만 그때는 남편하고 아내도 그다지 대화를 많이 하던 시절이 아니야. 공부 잘하면 흐뭇한 표정 짓는 것 그게 사랑인 줄 알고 컸어. 그게 참사랑이야. 아버지는 일본을 조금이라도 옹호하면 화를 냈지, 그 밖에야 일정하니까. (변절한) 최린씨가 우리집에 와보고 나한테 돈을 쥐어주고 간 걸 아시고는 불같이 화를 내더라는 이야기는 다 알려진 거잖아. 그때는 학도병들이 (출정) 나가게 되면 아버지한테 도장을 받으러 와. 여기에 도장을 찍으면 일본 정부에 협조했다는 뜻이 되니까 자꾸 시키는 거지. 아버지를 찾는 손님이 오면 나는 멋모르고 문을 열어드리는데 나중에 돌아오셔서 그런 사람인 걸 알면 물건이 날라가고. 그때는 무서웠지. 주로 사랑에 계시니까 심부름시키면 가져다 드리기나 하고 그러지 계집애가 어른들 있는 사랑에 갈 일도 별로 없고. 어려서 책보시면 무릎에 앉았다 일어난 정도나 기억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훌륭하신 분인데 좀더 많이 대화도 나누고 기억날 일을 만들겠다 싶지만 그때야 뭘 알았나."

_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어요?

"어머니는 충남 보령 사람인데 외가가 벼슬하던 집안이고 작은 외할아버지가 계동 살았어요. 나라일 하는 사람의 부인은 참 힘들어. 엄마가 효부, 남편의 효부지. 옛날에는 (겨울이면) 단스(일본식 장롱) 아래에 놋대야에 물을 떠놔. 엄마는 새벽 4시면 일어나서 그걸로 세수하고 밥 하시는 거지. 아버지가 일어나시면 세숫물 떠드리고. 아버지는 생각하신다고 뒷짐 지고 방을 돌던 생각이 나. 마당도 돌고. 아버지가 술을 참 좋아하셨어요. 친구도 좋아하고. 우리집 위가 산이야. 소나무가 많은. 그런데 거기 일본경찰이 상주해서 늘 우리집을 감시하니까 손님들이 많이 오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엄마는 아버지를 위해서 집에 술이 떨어지지 않게 담아두셨어요. 방에서 셋이 다 함께 잤는데 내가 누운 자리 옆이 바로 술독이었어. 독립운동 하는 사람은 돈 생기면 독립운동에 다 쓰잖아. 그러니까 집안 살림은 엄마가 재봉틀로 삯바느질 해서 꾸려갔어요. 그때는 다 그랬어. 나라 일 하는 사람은 집안 일에 신경 안 쓰게 여자가 무조건 희생하는 게 당연했지."

_만해 선생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너무 힘들어서 차에 뛰어들었다가 다리를 못 쓰게 되어서 동네산부인과 의사가 거뒀다는 기록도 있던데요.

"그거 봐. 그따위로 쓰니까.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래서 내가 심우장이나 아버지에 대한 기사는 아예 보지를 않아요. 6.25 나서 피란을 못 가고 먹을 게 없어서 쌀겨를 (개떡해서) 많이 먹었어. 그래서 나중에 엄마가 속병이 났던 모양인데, 그 밖에는 아주 건강한 분이셨고 아무리 힘들어도 점잖은 집안에서 그럴 리야 있나. 당시 돈암동에 정자영(鄭子英)씨라고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가 엄마 친구였어. 그 때 말로 에스자매라고 있잖아. 아버지 돌아가시고는 그 양반이 많이 도와줬지. 내 이름도 그 자영이 이모 이름에서 영을 따고 엄마 이름에서 숙을 따서 아버지가 지은 거야.(정자영씨는 1921년에 동경여의전을 졸업한 의사로 고은이 쓴 <한용운 평전>에 따르면 만해의 두번째 혼인 무렵 단성사 옆에서 진성당병원을 개업하고 있었으며 만해의 아내인 유숙원은 이곳의 간호부였다. 정씨의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도인데 선학원에서 만해가 아내를 얻을 생각이 있는 것을 적음스님으로부터 듣고 둘을 중매했다고 고은은 적었다.) 어머니가 미국을 가셨다고? 우리 딸이 미국에 유학을 가서 내가 손주들 돌보려고 미국 간 적은 있지. 우리 어머니는 그런 적이 없어요."

_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건강하셨어요?

"그럼요. 기침 감기를 한번 한 적이 없어요. 목소리가 아주 찌렁찌렁하고. 쓰러지시면서 건강이 나빠지셨지."

_1911년에 만주에서 총으로 피격을 당해 목이 삐뚤어졌다는 말은 있던데.

"그렇지는 않고 그 후유증으로 체머리는 있으셨지."

_좋아하는 음식이 따로 있었나요?

"게장. 민물게장을 좋아하셔서 어머니가 동대문 시장에서 그 새끼줄로 꿴 게를 사다가 늘 담았지. 그때는 그게 싸니까. 그리고 김치. 먹는 게 김치지, 어쩌다 생선토막 올라올까."

_ '님의 침묵'의 님이 조국이 아니라 실제 사귀었던 연인이다, 이런 설도 있는데요.

"실망이다. 그걸 입에 담다니.(당혹해 하는 표정을 보더니 웃으며) 아니야. 궁금한 건 풀어야 돼. 독립운동가도 남자고 사람인데 여자를 사귀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모든 대중이 보는 시집에 그렇게 쓸 분은 아니야."

_북한의 만해 후손들과는 혹시 접촉을 해보셨는지.

"난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 작품 중에도 적색이 들어 있달지, 그런 건 좋아하지 않아요. 6.25 나고 공산주의자들한테 엄마 재봉틀도 빼앗기고 말도 못하게 고생을 했어요. 그리고 내가 원래도 알고 지내던 사람이면 찾기도 하겠지만 전혀 연락도 없던 사이인데 새삼 나서서 찾는다는 게 되려 이상하지."

­_망우리에 있는 묘소를 국립현충원으로 옮기자는 이야기는 계속돼왔는데.

"망우리 모시기도 힘들었어요. 친구분들이 어렵게 마련해주신 거거든요. 그대로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거기도 독립운동가들이나 정치인들이 많으세요. 아버지는 와글와글하고 떠받드는 걸 안 좋아했어요. 만약에 망우리가 폐쇄된다면 고향인 홍성으로 모셔야겠지요. 생가 자리도 있고 동상도 있잖아요."

­_아버님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애국애족"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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