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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 읽기] 보복이 아니라 토론, 그게 인간 문명의 기초

입력
2017.09.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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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박물관에 소장된 2세기의 아폴로 신 조각상. 아폴로 신은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를 아테네로 보낸다.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박물관에 소장된 2세기의 아폴로 신 조각상. 아폴로 신은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를 아테네로 보낸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의 피로 물든 칼을 들고 있다. 그는 이 절박한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잠시나마 유지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델피 신전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도 여사제만 신탁을 받는 장소인 지성소(至聖所)로 감히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처한 운명을 한탄하며 울부짖는다. “나는 어떻게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살해한 운명을 타고 났는가? 그리고, 이 곳 델피 신전으로 도망쳐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한탄이나 원망이 오레스테스에게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 그는 그 순간에 자신을 위한 최선을 선택한다. 그는 델피 신전의 지성소 정중앙에 위치한 ‘옴팔로스(omphalos)’를 부여잡고, 자신의 삶에 해답을 얻을 때까지 무모하게 기다린다.

우주의 배꼽, 옴팔로스

‘옴팔로스’는 그리스어로 배꼽이란 뜻이다. 모든 인간은 태아시절, 배꼽으로 이어진 탯줄을 통해, 어머니로부터 매일매일 자양분을 얻고 인간으로 태어난다. 옴팔로스는 ‘없음’의 존재를 ‘있음’의 존재로 변화시킨 마술의 공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피 신전 지성소에 안치된 ‘커다란 돌’ 옴팔로스를 통해 지구가 탄생하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생겨났다고 믿었다. 옴팔로스는 만물을 탄생시키는 시간과 장소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크로노스 신은 부인 레아를 통해 태어날 아들(제우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레아는 제우스를 살리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그녀는 옴팔로스라는 커다란 돌을 제우스인 것처럼 배내옷으로 감싸 크로노스에게 주었다. 옴팔로스는 제우스를 살렸을 뿐만 제우스를 통해 만들어진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문명을 보장해준 매개체다.

아폴로 신의 여사제 피티아는 옴팔로스에 걸터앉아 있는 오레스테스를 보고, 악몽을 꾼 어린아이처럼 공포에 질려 뒷걸음치며 말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눈으로 감히 쳐다 볼 수 없는 공포, 이 끔찍한 공포가 아폴로 집으로부터 나를 쫓아내었다. 나는 힘에 부쳐 비틀거리며, 두 다리로는 서 있을 수 없어 나는 떨면서 엎드려 조금씩 기어간다. 나 같이 늙은 여자가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차라리 그녀(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그 안에 놓인 화관에서 나오는 연두색으로 가득한 지성소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신으로부터 오염된 사람이 신에게 간청하는 사람처럼 옴팔로스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방금 사용한 칼과 빛나는 양털로 만든 울 타래로 장식된 올리브 가지를 들고 있었다.” (‘자비로운 여신들’ 34-45행)

한 손에 ‘정의’의 이름으로 어머니를 살해한 칼을 들고, 다른 손에 ‘용서’를 비는 양털로 장식된 올리브 가지를 들고, 옴팔로스를 감싸고 있는 오레스테스! 인생은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전쟁과 평화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다. 운명에 의해 자신이 저지른 행위로 딜레마에 빠진 인간인 오레스테스는 이곳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분투한다. 오레스테스는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는가? 누가 그를 도와줄 수 있는가?

오레스테스의 부활을 돕는 아폴로

피티아는 이 처참한 광경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간직해온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터부다. 아폴로 신과 오레스테스가 신전으로부터 나와 대화한다. ‘아폴로’라는 그리스 단어의 어원은 알 수 없다. 다만 추측만 난무한다. 그들 중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란 의미를 지닌 ‘아펠라(paella)’란 의미가 눈길을 끈다. 아폴로 신은 자신을 찾아오는 길을 잃은 동물들에게 쉴만한 울타리를 제공하는 신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크라틸로스’라는 책에서 아폴로란 단어의 어원설명을 시도한다. 그는 ‘대속(代贖)’을 의미하는 ‘아폴뤼시스(apolysis)’와 연결시킨다. ‘대속’이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해 자신이 대신 그 형벌이나 벌금을 감수하는 행위다. 아폴로가 겁에 질려 탈진 상태에 있는 오레스테스에게 말한다.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끝까지 너의 안내자가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때나 네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모두 그렇다.”(77-78행)

오레스테스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아폴로를 만났다. 아폴로는 오레스테스를 단순히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보호하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그리스어 표현은 ‘디아 텔로우스(dia telous)’다. 이 문구는 오레스테스가 원하는 목표가 이루어 질 때까지, 아폴로는 그를 보호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아폴로가 말한 첫 문장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는 그리스 사상에 어울리는 문장이 아니다. 성서에서나 나올 법한 문장이기 때문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아폴로 신을 인간의 희노애락을 공감하는 신으로 묘사한다. 아폴로는 ‘눈에는 눈’이라는 복수가 유일한 정의라고 외치는 오래된 신들과는 달리, 오레스테스라는 개인의 처지와 자신을 일치시켜 오레스테스의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

아테네 원형극장에서 이 아폴로의 외침을 들은 아테네 관객들은 가만히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들도 오레스테스만큼의 큰 죄는 아니지만,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면서 스스로 불안하였다. 그들은 당시 왕족이나 귀족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정한, 복수에 근거하는 정의라는 사회규범에서 몸을 웅크려야만 했다. 아폴로는 오레스테스에게 델피에 더 이상 머무르지 말고 ‘팔라스 아테나 여신’의 도시인 아테네로 가라고 명령한다. 그곳엔 델피와는 다른 새로운 원칙과 문법이 있으며,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 대접받는 이상적인 사회가 있다고 말한다.

신탁의 델피에서 변론의 아테네로

아테네라는 도시는 아테나 여신이 다스리는 공간이다. 플라톤은 위에서 언급한 책 ‘크라틸로스’라는 책에서 ‘아테나’ 여신을 정신과 지성의 소유자라 설명한다. 그녀가 통치하는 아테네는 복수가 정의로 여겨졌던 과거와는 다르다. 아테네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통해 새로운 정의를 구축하는 문명사회다. 아폴로는 오레스테스에게 주문한다. “아테네에 도착하면, 탄원을 하는 사람처럼, 양팔로 그녀의 오래된 형상을 들고 있어라. 그러면 우리는 네가 가져온 사건과 현란한 말들을 판단할 재판관들을 세울 것이다.” (94-97행)

아폴로는 정의를 실현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처음으로 언급한다. 오레스테스가 간청하는 사람처럼, ‘아테나 폴리아스(Athena Polias)’라고 불리는 올리브 나무로 만든 조그만 아테나 여신 모형을 들고 법정에 가면, 재판관들이 오레스테스의 주장과 수사를 듣고 판결을 내릴 것이다. 아테나는 법과 질서의 상징이다.

델피에서 아테네로 이주하는 사건은, 정의가 신들이 정하는 신탁에서 인간들의 토의와 재판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신으로부터 신탁을 받아 판결하거나, 신탁을 조정하는 상류층의 횡포에 맞서, 누구나 자신의 이성과 지성으로 무장한 설득의 힘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법정에서 주장할 수 있다. ‘눈에는 눈’으로 대표되는 분노의 여신들의 정의가, 이제는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토론으로 대치되었다.

혈연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서약

클리템네스트라는 자신의 복수를 대신 행하기로 약속한 ‘분노의 여신들’이 델피 신전에서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화낸다. ”아직도 잠을 자고 있다니. 너희들 일어나라! 너희들이 잠자서 내게 이로운 것이 무엇이냐? 너희들 때문에 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치욕적으로 지내고 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제물을 너희에게 바쳤는가?” 클리템네스트라는 그들에게 물과 꿀, 그리고 동물들을 제사를 통해 수없이 바쳤다. 그녀가 아무리 일어나라고 외쳐도 그들은 신음소리와 흐느끼는 울음소리만 낸다. 그녀는 그들이 동물 핏자국 흔적이 내는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냥개처럼 짖고만 있다고 꾸짖는다. 합창대로 등장한 ‘분노의 여신들’은 아폴로를 원망한다.

아폴로는 자신의 옴팔로스가 살인자의 피로 범벅이 되었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신들보다 인간을 우위에 두었다. 그는 ‘운명’이라는 오래된 권력을 파괴하였다.” (190-192행) 아테네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문명은 혈연이 아닌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서약하는 결혼이란 제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아폴로는 말한다. “결혼은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이다. 어떤 서약보다 위대하며, 정의는 그것을 보호한다.” 결혼이란 제도가 혈연보다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결혼이 아테네 문명의 근간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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