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양기탁(1871~1938)은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항일운동을 크게 보도했다. 한일병합 후 탄압이 심해지자 중국에서 활동을 이어 가다 이국 땅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67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이후 후손들은 3대까지 혹독한 가난과 마주해야 했다. 부인 이경숙씨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날품팔이를 하고 쓰레기장에서 감자를 주워 먹으며 딸과 끼니를 때웠다. 외손녀 황대순(69)씨는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조국도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황씨는 1997년 한국을 찾았지만 어머니가 호적에 할아버지의 딸로 등록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국적 획득에 실패했다. 황씨는 천신만고 끝에 후손임을 증명할 수 있었고 2008년에야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항일 운동에 헌신한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의 현주소다. 정착 지원금은 고사하고 일부는 후손임을 입증하지 못해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는 신세다.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고단한 삶을 엿볼 자료는 5년 전인 2010년 국가보훈처가 발표한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 국내 정착 실태조사’가 유일하다. 정부가 해외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정착금을 지원하기 시작한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영주귀국자 393명 중 38%(149명)가 무직자, 42%(167명)가 막노동과 식당, 가사도우미 등 일용직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대부분(89%)이 무주택자였고, 보훈처가 정한 생계유지층(기본생계비 50~100%) 이하는 무려 79%에 달했다.
지원금도 턱없이 부족하다. 보훈처가 지급하는 정착지원금 4,500만~7,000만원과 연금(52만~186만원)이 전부다. 그나마 후손 1명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고, 지원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다. 후손임을 입증하는 단계부터 벽에 부닥친다. 외국에서 항일운동을 한 경우 자료를 모으기 쉽지 않고, 선대(先代)의 고향이 북한이면 가족관계를 증명하는 문서를 구하기 어렵지만 그 입증 몫은 오로지 후손의 손에 맡겨져 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10일 “6ㆍ25전쟁 전사자는 정부가 유해 발굴에 나서고 희생자를 예우하는데 유독 해외독립유공자만 입증 책임을 후손에 돌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보훈처는 해외 독립운동가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학계에서 추정하는 해외 독립운동가 수는 대략 10만명. 그러나 1995년부터 올해 8월까지 귀국한 해외독립유공자 후손은 1,695명에 불과하다. 보훈처 관계자는 “사료 부족과 해외 연구의 어려움 등 해외독립운동가 파악에 현실적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안은 3년째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새누리당 황영철 의원은 2012년 해외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주거지원금을 지급하고, 정착에 필요한 직업훈련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김우회 영주귀국독립유공자 유족회 이사는 “올해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법안이 폐지될 위기에 놓여 있다”며 “타지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의 후손이 명예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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