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大 페미니즘 강좌 개설
험난한 논문 심사 과정 거치며
美 여성주의 문학으로 석사학위
美서 박사학위 받고 모교 교수로
#'교내 성희롱 고발' 수업 파문
외국어학부 학장 직 박탈당하고
수강 포기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아랍여성에 '권리의 주체' 일깨워
1984년 요르단대학 영문과 대학원생 룰라 콰워스에게 지도교수가 추천한 논문 주제는 T.S 엘리엇과 타예브 살레(Tayeb Saleh, 1929~2009)라는 영국서 활동한 수단 출신 이슬람 작가의 작품 분석이었다. 콰워스는 그 무난한 선택이 못마땅했다고 한다. 그는 19세기 미국 페미니스트 작가 케이트 쇼팽(Kate Chopin, 1850~1904)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슬람권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친서구적인 요르단에서조차 생경한 작가였다.
콰워스는 쇼팽의 대표작 ‘각성(The awakening)’에 매료돼 있었다. 1899년 작품 ‘각성’은, 애정 없이 결혼해 두 아이를 둔 미국 남부의 한 상류층 여인(에드나)이 여름 휴양지에서 육체적ㆍ정신적 사랑에 눈 뜬 뒤 시대와 계층의 인습과 아내이자 어머니에게 부과된 사회적 금기, 윤리적 책임을 벗어 던지고 여성으로서의 주체적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 당시로선 “적나라한” 육체적ㆍ심리적 성애 묘사로 “천박하고 혐오스럽다”는 평가와 불륜을 미화한 “유해한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작가는 지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책은 공공도서관에서조차 거부당한 이력을 지닌 문제작이었다.(1991년 이소영이 번역한 첫 한국어판 제목은 ‘이브가 깨어날 때’였고, 이지선이 옮긴 2010년판은 ‘이 명박한 세상을 여자가 느껴 깨칠 때- 각성’, 홍덕선 등의 2012년판은 ‘내 영혼이 깨어날 때’이다.)
80여 년 뒤의 요르단, 그것도 돋보이는 어학코스 덕에 서구 유학생도 꽤 많다는 요르단 국립대학 영문학과의 젠더 의식과 성 윤리가 쇼팽이 살던 19세기말 미국 남부 상황보다 진전됐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콰워스는 논문을 포기하고 미국에 유학 중이던 남동생에게 건너가 석 달 남짓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작가 이디스 워턴(Edith Wharton, 1862~1937)과 윌라 캐더(Willa Cather, 1873~1947),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 1892~1950) 등을 알게 됐다. 콰워스에겐 그들의 작품뿐 아니라 성(gender)에 갇히길 거부했던 그들의 삶, 예컨대 워턴의 여행 편력과 당당한 이혼, 스메들리의 저널리스트 활동 등이 부러웠을 것이다.
귀국 후 그는 용기를 내 교수에게 미국 여성주의 작가 넷에 대한 논문을 쓰겠다고 했고, 대강의 작품 내용을 설명했다. “교수님의 첫 반응은 ‘섹스에 대해 쓰겠다는 거냐?’는 거였어요.” 논문을 지도해줄 만한 페미니스트는커녕 여성 교수도 전무하던 때였다. 논문 심사- 통과 과정이 험난할 것이라며 교수는 만류했지만, 그는 각오가 돼 있노라 말했다고 한다.
어쨌건 그(의 논문)는 교내에 모스크를 둔 그 대학의 완고한 남자 교수들을 설득해냈고, 1991년 요르단에선 처음으로 페미니즘 문학 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땄다. 미국 노스텍사스대에서 박사학위(1995)를 받고 귀국 후 모교 영문과 교수가 된 그는 비록 내개 대학원 선택과목이긴 했지만 요르단 최초의 페미니즘 강좌를 개설했고, 대학 내 여성학연구센터와 요르단 국가여성위원회 지식생산분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만들고 이끈 건 강좌와 연구센터가 아니라 요르단의 새로운 한 세대였다. 룰라 콰워스가 7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57세.
룰라 부트로스 콰워스((Rula Butros Quawas)는 1960년 2월 25일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 정보기관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영어 교사였다. 그의 조국은 형식상 국왕 위에 헌법을 둔 입헌군주국으로, “모든 시민은 인종과 언어, (심지어) 종교로 차별 받지 않는다”(제6조)는 조항을 두었지만, 거기에 ‘젠더’는 포함시키지 않는 나라다.(hybrismedia.com, 2017.6.6) 여성 투표권이 인정된 건 1974년이었다. 1948년 무일푼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이민 온 부모는, 가난했지만 자녀 교육을 중시했고 특히 어머니가 룰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가 교사로 일하던 암만의 사립 여학교(Al Ahliyyah)를 나왔다.(alaraby.co.uk)
미국 예일대 여성센터 블로그 ‘Broad Recognition’과의 2011년 4월 인터뷰에서 콰워스는 쇼팽을 알게 된 대학원 시절부터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인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훨씬 전부터 여성(의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품고 있었어요. 페미니즘은 당신이 매일 먹고 마시는 것들처럼, 내겐 자연스러운 거였어요. 대놓고 페미니스트라 말하기 시작한 건 대학서 페미니즘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부터였죠.”
대부분의 처음이 그렇듯, 그의 선택은 급진적이고 혁명적이었다. 풀브라이트 스칼러(Fulbright scholar)로 미국 버몬트대에 체류하던 2014년 인터뷰에서 그는 “그들(동료 교수들)은 나를 매의 눈으로 감시하곤 합니다. 나는 서방의 첩자라는 말도 들었고, 학생들의 마음을 식민화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죠. 실은 내가 그들을 탈식민화하는 거예요. 그들은 내게 뭔가를 하더라도 제발 쉬엄쉬엄 하라고, 그게 진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이 21세기잖아요. 요르단에는 혁명적 변화가 필요해요”라고 말했다.(vermontwoman.com)
“쉬엄쉬엄 하라”는 저 조언은, 2년 전 그의 강좌 수강생들이 수업 과제로 제작ㆍ발표한 교내 성희롱ㆍ추행 고발 비디오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2011년 가을학기 페미니즘 이론수업을 들은 학생(전원 여성)들이 학내에서 겪은 성희롱 사례를 적은 피켓을 들고 얼굴을 가린 채 찍은 그 148초 분량의 비디오에 온 나라가 경악했다고 한다. 제자 중 누가 히잡을 벗고 다녀도 콰워스를 흘겨보던 때였다. 요르단 언론들은 콰워스가 학생들을 대놓고 선동한다고 비판했고, 일부는 피켓의 문구들 자체가 외설이라고 비난했다. 대학측도 콰워스가 학교의 위신을 훼손했다며 그의 외국어학부 학장 직을 박탈했다. “동료 중 누구도 내 연구실에 찾아와 격려해준 이가 없었어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다들 가족이 있고, 월급이 필요하고, 지켜야 할 평판이란 게 있죠. 그러더군요. 그들은 (독신인) 나처럼 자유롭지 않다고요. 하지만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그는 매일 밤마다 집에 가서 울었다고 말했다.
바깥에서는 거꾸로 요르단 사회와 대학의 반응에 경악했다. 북미동아시아학회가 요르단 정부 및 요르단대 총장에게 공식 항의 서한을 보냈고, 민주주의 인권을 위한 국제 독립언론 ‘Open Democracy’는 그 일이 있기 직전 세계 500대 대학 진입을 목표로 선언한 요르단대학의 후진성과 여성인권의 실상을 칼럼으로 고발했다. 콰워스는 끝내 보직을 되찾지 못했다. 비디오는 “시민 자유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프라이버시, 그것이 나의 자유다”라는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콰워스의 행보, 요르단 페미니즘의 진전은 적어도 콰워스 입장에서는 아주 더딘 거였다. 2000년대 초 교수로 임용된 뒤 그는 우호적인 동료 교수들의 조언에 따라 종신 재직권(Tenure)을 받기 전까지 커리큘럼에서든 학내 활동에서든 무척 몸을 사렸다고 한다. 페미니즘 자체를 거의 몰랐고, 안다고 하는 이들도 이슬람과 무관한 서구문화 혹은 반이슬람 정서의 한 갈래쯤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콰워스는 여성이고, 독신이고, 팔레스타인 혈통의 그리스정교회 신자라는 ‘장애’까지 안고 종교ㆍ사회적 몽매에 맞서야 했다. 그는 자신과 자기 강좌와 제자들을 지키기 위해, 신자들보다 더 열심히 ‘쿠란’을 읽고 연구해야 했다고 말했다. 예일대 인터뷰에서 그는 “영문학과장이 하루는 나를 부르더니 ‘당신이 미국 페미니즘으로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박사로 인정 못한다고 하는 이들이 많다’고 하더라”는 말도 했다. 교수직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엄포이고 협박이었다.
제자들이 겪은 어려움도 컸다. “페미니즘 강좌를 수강하는 사실을 주위에 비밀로 하던 제자도 있었어요.(…) 그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 찍힐 수 있는 낙인들, 예컨대 레즈비언이라거나, 남성혐오주의자라거나, 비이슬람ㆍ반이슬람주의자라거나, 서방의 첩자라거나 하는 것들…, 한 마디로 국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당할 수 있는 거죠.”
수업 자체의 어려움도 컸을 것이다. “강의나 토론 중 듣고 말해야 하는 어떤 단어들- 페니스, 버자이너, 몸의 정치학, 성소수자 정체성 등-은 그 자체로 종교적 규범에 대한 ‘도전 또는 범죄(transgressions)’라 여겨질 수 있죠.” 페이스북 계정을 세 개씩 만들어 가족용 친구용 애인용을 따로 쓰는 제자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젊은 여성들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일까? 그 거짓말은 물론 살기 위한 방편일 테지만, 그게 제대로 된 삶일까?” 그는 연민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둔 제자도 있었고, 낮엔 일을 하고 저녁 수업을 듣는 학생도 있었다. 공부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시선을 감당하는 게 힘들어서 수강을 중도 포기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hybrismedia.com, 17.7.2)
그런 속에서도 그의 강의실은, 그 자체로 여성들의 값진 해방구이자 저항의 진지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매일 아침 눈 뜰 때마다, 주문을 외듯, 우리는 자율적 권리의 주체이며 그 권리 위에서 이미 당당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지난 4월 청년ㆍ여성 인권을 주제로 열린 요르단대학 모의유엔총회 연설에서는 13세기 이슬람 법학자이자 시인 루미(Rumi, 1207~1273)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여러분은 대양을 이루는 물 한 방울이 아니라 그 대양을 품은 방울들입니다.(not a drop in the ocean, but the entire ocean in a drop.)” 그 말들은 콰워스 자신의 오랜 주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눈엣가시였을 그의 교수직을 지켜주고, 2006년 대학 내 ‘여성학 연구센터’를 설립할 수 있게 한 데는 현 국왕(압둘라 2세)의 고모인 바스마 빈트 탈랄(Basma Bint Talal(1951~) 공주의 후원 덕이 컸다고 한다. 2009년 콰워스는 여성 지위 및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탈랄 공주가 주는 리디십ㆍ헌신 공로훈장을 탔고, 2013년 미 국무부의 ‘국제 용기의 여성상(IWCA)’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 8월 1일, 요르단 의회는 강간범이 피해자와 결혼하면 기소하지 않도록 규정한 형법 308조, 이른바 ‘강간범 결혼 면책법(Marry-Your Rapist Law)’을 폐지했다. 성폭력 피해를 가문의 수치로 여겨 여동생이나 딸을 ‘명예살인’하기도 하는 아랍 몇몇 나라와 가톨릭국가 필리핀 등이 지금도 저 법을 유지하고 있다. 앞서 모로코가 강간을 당한 뒤 강제 결혼을 앞두고 있던 16세 소녀 아미나 필라리(Amina Filali)의 자살 2년 뒤인 2014년 저 법을 폐지했다. “여성은 고깃덩이가 아니라 영혼을 지닌 주체로 인식돼야 한다. 반드시 그리 되리라 나는 믿는다. 내 생애에 이뤄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jordantimes.com, 17.7.27)이라고 말하던 콰워스는, 저 기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는 대동맥 파열로 수술을 받았지만, 사인은 생체검사 합병증이었다.
콰워스는 20대 무렵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이 옳다는 걸 믿기 때문에, 내 소명임을 알고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누구도 내게 다른 길을 가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좋은 교육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교육이란 스스로 뭔가를 해낼 수 있는 힘과 기술, 비판적이고 창조적이며 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맞서 도전하며 ‘내 생각은 다르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nytimes.com,17.8.2) 그의 지인과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뿐 아니라 그의 열정과 애정을 더불어 추모했다.
20대 초반의 콰워스는 소설 ‘각성’을 읽으며 부러움과 막막함과 자괴감으로 흐느꼈다고 말했다. 소설은 주인공 에드나가 영혼의 해방을 맞이한 루이지애나 그랜드아일(Grand Isle)의 해변에 다시 가 알몸으로 헤엄쳐 나아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헤엄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던 그날 밤이 떠올랐고, 해변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공포심에 사로잡혔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에드나는 지금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린 소녀시절 시작도 끝도 없는 것 같은 푸른 초원을 가로지르던 그 때가 생각났다. 팔과 다리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이지선 번역, 문파랑)
에드나처럼, 콰워스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갔다. 하지만 그는 숨을 잃을 때까지 힘을 잃지 않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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